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헤르만혜서 Aug 01. 2023

러브하우스

너와 있으니 여름마저 좋다. 아침부터 낯선 새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저녁에는 푸른 노을의 황홀함을 보며 지브리 영화음악을 틀었다. 자두를 한 입 베어 물고 너의 폭닥한 품에 안겨 있으니 세상의 평안이 다 내 것 같다. 네가 내 소유가 아니면 어떠하랴. 잠시 머물다가는 인연이라도 너를 만난 행복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새로운 나의 집. 이름은 파라곤. 너에 대한 헌정을 바친다.


동생들이 가끔 나에게 묻는다. "결혼하면 어때요?" 사랑이라 하면 유통기한이 뻔히 보이고, 안정감이라고 하기엔 뻔하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말했다. "좋은 집에서 남편이랑 스킨십하고 같이 밥 먹는 게 좋지" 이 말은 파라곤으로 이사를 오고 확실해졌다. 나는 좋은 집에 살기 위해 결혼을 했다.


나는 집에서 태어났다. 마을 재실에 딸린 단칸방에서 나와 동생들이 태어났다. 나는 그 집에서 자라나면서 소원이 있었다. 수세식 화장실과 나의 방을 가지고 싶었다. 독립해 원룸에 혼자 살면서 그 소원은 이루었지만 10번의 이사를 하고 나서야 비로소 유토피아 같은 집으로 안착했다. 파라곤엔 바닥에 가득했던 과자껍데기도, 수십 명이 누웠던 푹 꺼진 옵션 침대도, 검은 물이 흐르는 곰팡이와 바퀴벌레도 없다.


처음 독립해 살았던 원룸은 낡고 습하고 주변에 고성방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원룸 대문에는 오색찬란한 비닐 속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길고양이들이 도둑처럼 내 발길을 염탐했다. 설국열차가 개봉했을 무렵에는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타났다. 바글대는 바퀴벌레가 머리카락 위를 지나가는 상상을 하니 집은 머무르는 곳이 아닌 버티는 곳이 되어버렸다.


첫 번째 신혼집을 계약하고 아파트에 살게 될 내가 기뻤다. 평생 살던 낮고 어두운 집을 벗어나 새 가구들로 가득한 집을 생각을 하니 평범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었다. 오늘의 집에서 본 모델하우스 같은 집은 아니더라도 단정하게 공간을 채워나가길 기대했다. 그렇게 고대한 집은 어설펐다. 식탁에는 바퀴 달린 공부방 의자가 자리 잡았고 매일 벗어던진 허물들이 소파와 침대 위에 시체처럼 널렸다. 어설픈 모습은 실패 같았고 서서히 집에 대한 애정이 식었다.


한번 실망했던 터라 파라곤에게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거실 인테리어와 가구 구입은 모두 남편에게 맡겼다. 내가 한 결정이라면 TV를 안방에 넣고 서재형 거실을 만들어 책을 읽고 살자는 정도였다. 예상과 다르게 남편의 선택들로 채워진 집은 <러브하우스>의 BGM이 저절로 흥얼거려지는 공간이 되었다.


비 오는 여름방학, 대청마루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삶은 옥수수를 먹으며 바라보았던 시골풍경이 생각났다. 내가 기억하는 단란한 집의 기억이다. 이곳에도 도시의 야경이 보이는 큰 창이 열렸고 고요히 책 읽는 공간이 생겼다. 남편 퇴근시간에 맞추어 끓인 참치김치찌개를 나눠 먹으니 여기가 천국같이 느껴진다. 나의 집은 점점 나아지고 나도 점점 나아졌다. 그 집에는 누군가가 함께 산다.



작가의 이전글 불행한 네가 가끔 부럽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