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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르만혜서 Aug 08. 2023

죄송하지만 죄송무새라서 죄송합니다.

껍데기는 이만 퇴근합니다.

업무 할 때 쓰는 갤럭시 휴대폰에 녹음파일이 8800개가 넘어갔다. 입사한 지 900일이 넘어가도록 나는 계속 미안하고 죄송해했다. 저 녹음파일의 절반도 죄송하다는 말이렸다. 그중에 진심은 열손가락도 안 된다. 어떤 사과는 손톱의 거스러미를 떼면서 하기도 했고, 어떤 사과는 다리를 떨면서, 어떤 사과는 친구와 카톡을 하면서 했다. 지나가던 행인과 어깨가 부닥쳤을 때 튀어나오는 말과 다를 게 없다.


같이 일하는 동료들은 덜 죄송해하는데, 나만 밥먹듯이 미안하다. 나와 통화하는 상대들은 날카롭게 발톱을 드러내려다가도 나의 죄송무새 공격에 힘을 뺀다. 쉽게 뱉어낸 사과는 힘이 없다. 쉽게 내려간 꼬리에 전의를 상실한다. 이렇게 해야 쉬워지는 밥벌이다 보니 밥먹듯이 미안해한다.


한 번은 사과를 하러 고객 집 앞에 찾아간 적도 있다. 선생이라는 상대는 나의 태도를 불쾌해했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하러 오지 않으면 언론이며 본사며 찾아가  문제를 키울 사람 같았다. 팀장의 납작 깔린 사과에도 고객의 기분은 나아지지 않았다. 팀장은 어쩔 줄 몰라하며 "집 앞으로 찾아가서 사과하라"라고 했다. 나는 그 고객의 아파트 입구에 서서 양손을 곱게 모아 기다렸다. 퉁명한 표정으로 나온 고객에게 대국민 사과문 같은 대사를 읊었다. 사과를 들은 고객은 별말 없이 앞으로 그러지 마라며 줄행랑을 치듯 집안으로 들어갔다.


무수한 죄송들은 나를 짓누르지 않는다. 죄송한 건 회사고 나는 회사의 껍데기다. 고객은 나를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고 나도 그렇다. 내가 없는 회사생활에서 사무적이고 기계적이게 부품처럼 일한다. 다행인 건 어제 죄송했던 고객을 내일 또 만날 일이 없다는 것이다. 가벼운 죄송들을 흩날리며 껍데기는 퇴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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