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문정 Sep 27. 2023

영혼을 얼마나 끌어 모아야 밀려나지 않을까

영끌과 패닉바잉을 권하는 사회



박준의 시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침묵이 어색한 사이라 대화를 위한 대화를 이어가야 하는, 딱히 할 말이 없어서 무난한 날씨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을 일 때문에 마주하는 시기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문장이다.


이처럼 불편한 사이의 스몰토크를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지만 내 경우엔 꽤나 즐기는 편이다. 다시 보지 않을 게 확실한 사람들과도 서툰 대화를 이어가는 걸 흥미롭게 느끼는 이유는 요즘 사람들의 관심사를 넓게 체감할 수 있어서다.


대중의 불안이나 결핍의 방향을 제일 정확하게 보여주는 지표 중 하나는 베스트셀러 책의 목록이라고 생각한다. 독서는 여타의 콘텐츠와 달리 돈을 내어서 따로 소장한 뒤 집중력을 고도로 발휘하여 소화해야 하는 작업이기에 그만큼 절실한 내면의 동기가 있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


IMF 시기 유독 가족에 대한 책이나 힐링 관련 책이 인기 있었던 것도, 한 때 여행에세이가 유행했던 것도, 한 때 인문학이 유행했던 것도, 한 때 종교인들의 책이 유행했던 것도, 재테크에 관한 책이 유행했던 것도 거시적인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고 믿기에 월 단위로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를 꼼꼼히 살펴보는 게 습관이다.  


책이 시대적 요구를 보여주는 매개라면,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는 스몰토크는 호불호가 갈리지 않을 거라고 가정된 최신 유행이자 상식(이라고 널리 동의된 정보)을 나누는 매개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나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는 하지 않을 이야기도 초면에 나누는 아이스 브레이킹에는 자주 등장하곤 한다.


내 경우엔 글쓰기 강의를 통해 꾸준히 새로운 학생들을 만나고 있을 뿐 아니라 전국 도서관이나 기업에서 강의를 하기에 회사 생활을 할 때보다 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어 스몰토크를 할 일이 많다. 스몰토크의 트렌드는 베스트셀러 목록만큼이나 꽤 자주 바뀌어간다.


최근 들어서는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날 때 대략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간다.


1) 벌써 2023년도 끝이 보이네요.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2) 완연한 가을이네요. 요즘 감기가 유행인데 조심하세요.

3) ‘나는 솔로’ 보시나요? / ‘무빙’ 보셨나요?

4) 코로나도 끝났는데 여행 계획 있으세요?


작년 이맘때만 해도 대화의 시작을 “언제쯤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까요”로 시작해서 “마스크가 이제는 너무 익숙하고 편한데 앞으로도 계속 쓰게 될 것 같아요” 등으로 포문을 열었다.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 ‘우영우’가 자주 화제에 올랐던 기억도 난다. MBTI를 물어보는 질문은 최근 몇년간 지속되고 있다.



사진: Unsplash의Philip Veater



스몰토크에서 사람들이 어떤 소재로 시간을 때우는지 항상 흥미로워하는 나지만 2020~2021년 사이에는 유독 그런 대화가 지루해서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그 시기에는 육아 동지를 만나든, 강의를 하러 가서 관계자를 만나든 모든 이야기가 거의 하나로 귀결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들 홀린 듯 돈에 대해 열을 올렸다.


코로나를 겪느라 세계적으로 통화량이 많아지고 낮아진 금리로 대출이 쉬워지면서 2020년과 2021년에는 다들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직장에서조차 일을 잘하는 사람보다 투자에 성공한 사람을 더욱 부러워했으며 “회사는 대출을 받기 위해 다닐 뿐” 같은 농담이 여기저기 떠다녔다. ‘경제적 자유’라는 단어가 성경 말씀처럼 떠받들어졌다.


그 시기 낯선 이들과의 주된 대화 흐름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1) 주식 / 코인 하세요? 어떤 거 하세요?

2) 그때 집을 샀어야 했는데…. 00 아파트 원래 N억이었는데 지금 N배 됐대요.

3) 저 최근에 집 샀어요. / 집 사려고 알아보고 있어요.


스몰토크의 대화 소재는 베스트셀러와도 결이 비슷할 때가 많은데 2020년 교보문고 종합 베스트셀러 목록만 확인해도 당시의 투자 열풍이 얼마나 거셌는지를 알 수 있다. 1위 <더 해빙>, 2위 <돈의 속성>, 4위 <하버드 상위 1퍼센트의 비밀>, 6위 <존리의 부자 되기 습관>, 7위 <주식투자 무작정 따라 하기>를 보더라도 상위 10위 안에 든 책 중 무려 5권이 재테크와 성공학에 대한 것이다.   


80년대 일본의 분위기가 아마 한국의 이 시기와 비슷했을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의 책『배움엔 끝이 없다』에는 거품경제가 한창이던 시기를 회고하는 부분이 나온다. 1985년 당시 그의 나이는 35세였는데 동창회에 모인 이들이 내내 주식 이야기나 부동산 이야기만 하고 있었다. 대화에 끼지 못하던 그는 “너는 주식 안 해?”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런 거 안 해. 돈은 땀 흘려 벌어야 하는 거 아냐?”라고 답했다가 바보라는 소리를 들으며 비웃음을 산다. 책에는 이런 표현이 있다. “그때의 억울함이 뼈에 사무쳐 있습니다. 지금도 원망하는 마음이 남아있을 정도니까요. (웃음) 절대 그런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2020-2021년을 생각하면 나 또한 경마장 안에 갇혀 있던 것 같다. 사람들의 환호와 비명 소리를 들으며 판돈을 걸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면서 두리번거리던. 건설 회사를 배후에 둔 언론사들은 ‘벼락거지’ 같은 신조어를 만들어내며 공포를 조장했고 지금 집을 사지 않으면 저 멀리 밀려나고 말 거라고 겁을 주었다.


삼호어묵이라는 필명을 가진 이가 ‘정부는 집값을 못 잡는 게 아니라 안 잡는 것’이라고 주장한 칼럼은 내 카톡 단체방에도 추천 글로 올라왔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같은 베스트셀러는 회사 일만 할 뿐 투자에는 관심 없는 사람을 노골적으로 비웃는다.


코인이나 주식을 하지 않으면, 집을 사지 않으면 바보가 되는 분위기 속에서 30대와 40대는 투자에 열을 올렸다. ‘영끌’로 ‘패닉바잉’을 했고 ‘부의 파이프라인’을 만들어야 한다며 각종 사이드 잡을 모색 하곤 했다.


2022년부터 부동산 가격과 주가가 떨어지기 시작하며 스몰토크 주제에서 ‘부동산’ ‘주식(코인)’ ‘투자’ 이야기가 쏙 빠졌다. "가즈아"를 외치던 목소리가 사라졌고 이제 “주식 어떤 거 하세요?”라는 대화는 금기가 됐다. 집값을 대화 소재로 삼던 시기는 끝이 났는데 대출금 반환 일정은 막막하게 진행 중이고 높아진 금리는 다시 낮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3040의 대출금 연체율은 올해 들어 십 퍼센트를 넘어섰다.


연간 출생아 수 70만 명 ~ 80만 명 대를 기록하던 80년대생과 90년대생이 영끌을 해 코로나 시기 아파트를 샀는데, 훗날 그들의 집을 사줄 2000년대생과 2010년대생은 40만 명과 30만 명 대의 벽을 차례차례 깨왔다. 급기야 2020년대 생은 20만 명 대를 기록하며 매년 신저점을 갱신 중이다. 한국의 인구수 변화만 봐도 ‘부동산은 장기적으로 우상향’이라는 믿음에 배반당한 적 없던 부모 세대와는 달리 3040은 고점을 잡은 것이 유력해 보인다.


명절이 되면 서울에 사는 자식들이 지방에 사는 부모를 만나러 가는 건 옛말이고, 이제는 경기도에 사는 자식들이 서울에 사는 부모를 만나러 간다는 말을 들었다. 집값이 폭등하며 서울을 떠난 3040 커플이 많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였다. 젊은 부부를 상징하는 표현 중 하나가 ‘신도시 부부’인 것도 이 분위기에서 나왔을 터다.


알고 있는 신도시 부부들의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본다. 성공하고 싶은 건 둘째 치고, 일단 밀려나선 안된다는 절박함 속에서 불안해하던 또래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피로와 불안이 기본값이 된 눈빛들을 본다. 다들 무언가를 열심히 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부족하다고 자책하는 것 같다. 자책이 몸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다.


돈 이야기만이 스몰토크의 소재이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지만 돈 이야기를 한사코 피해야 하는 분위기로 갑자기 전환된 모습에도 어색함을 느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투자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하던 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나는, 이 급작스러운 변화가 으스스하게 여겨진다. 불장난을 시작한 이들은 자취를 감추었는데 필사적으로 불을 끄고 있는 사람만 남았다.


일본에서는 거품 경제가 황망하게 사라진 80년대 후반부터 ‘자기 책임’이라는 말이 유행했다고 한다. 버블의 붕괴 이후 경제적으로 큰 손해를 본 이들 앞에서 사회 공동체에는 책임이 없다고 선을 그으며 나온 말이다.


이와 비교될 만한 한국의 표현이 ‘누칼협(누가 칼 들고 협박했나)’이다. 무언가에 실패해 괴롭다거나 처우가 좋지 않아 힘들다고 하는 등 타인이 괴로움을 표현할 때 비난하면서 대꾸할 때 쓴다. 처음 ‘누칼협’이라는 말을 접하고 거기 드러난 공감능력 결여와 비아냥의 악의를 느끼며 섬뜩했다. 온라인에서만 쓰는 말인 줄 알았는데 카페에서 친구에게 실제 그 말을 내뱉는 이의 얼굴을 확인하고 경악해서 자리를 옮긴 적도 있다.


일본에서 ‘묻지 마 범죄’가 크게 증가한 것과 ‘자기 책임’이라는 말이 유행한 것 사이에 유의미한 연관성을 찾아낸 연구 결과를 본 적 있다. 전문가들은 버블 경제 이후 긴 경제 침체가 이어지면서 고립된 청년층의 분노가 그처럼 무차별적이고 반사회적인 범죄를 키웠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유행한 ‘누칼협’이라는 비아냥과 '각자도생'의 무관심이 불러올 좌절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다들 그렇게 산다고, 영혼까지 끌어 모아야 여기서 버틸 수 있다는 말에 떠밀려온 우리 곁에는 이제 무엇이 남아있으려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