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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Sep 20. 2023

결혼을 하게 된 진짜 이유

현실적인 버전과 낭만적인 버전


사람들 얼굴 위에 마스크가 없는 걸 보는 게 더 익숙해지고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면서 부쩍 결혼식에 갈 일이 잦아진다.


가장 최근에 간 결혼식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손을 잡고 동시입장을 했다. 대기실에 앉지 않고 신랑과 함께 서서 손님들을 맞이하는 신부도 보았고, 피로연에서 드레스 대신 하얀색 슈트를 입고 인사하는 신부의 손을 잡고 덕담을 한 기억도 난다.


요즘엔 주례와 폐백이 거의 사라졌다는 말도 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주례가 있는 결혼식에 간 게 마지막으로 언제였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나와 주변 친구들이 많이 결혼했던 2010년 초중반까지만 해도 ‘싸우더라도 아침밥은 챙겨주겠습니다’ ‘남편에게 순종하겠습니다’ 같은 신부의 맹세를 들으며 갸우뚱할 때가 꽤 있었다.


나이 지긋한 남성이 주례를 보는 게 관례였고, 신부 아버지는 신부의 손을 잡고 걷다가 신랑에게 신부를 건네주었다. 씩씩해 보이는 신랑 옆에서 신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다소곳이 서서 수줍은 미소를 보이는 게 일반적이었다.


고작 10년 만에 결혼식 풍경이 이토록 바뀐 걸 곱씹어보면 새삼 놀랍다. 그럴 때면, 세상이 우리의 인식과 달리 나날이 진보하고 있음을 데이터로 증명한 한스 고슬링의 책 <팩트풀니스>의 메시지에 과연 그렇다고 도리없이 인정하게 된다.


오래전, “엄마는 왜 결혼했어?”라는 질문에 돌아온 대답은 이랬었다. “그때는 지금이랑 달라서 결혼을 안 한다는 선택지 자체가 없었어. 중매쟁이가 하라 하니까 얼굴 한 번 보고 했지. 그게 다야.”


봄이나 가을이 되면 유독 후배들이 결혼에 대해 물어온다. 그들은 내 부모 세대와 달리 결혼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한다. 아니 애초에 왜 결혼을 해야 하는 건지 질문한다.

 

질문하는 이들의 나이가 대개 30대 초반이라는 걸 감안하면, 박완서 소설가가 “요즘 사람 나이는 옛날 사람과 똑같이 쳐서는 안 되고 살아온 햇수에 0.7을 곱하는 게 제 나이다”라고 한게 정말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33에 0.7을 곱하면 23살이고, 그건 60년대생 여성의 평균 초혼 연령인 23.7세와 비슷하니까. 


누군가에게 질문하는 사람은 정말로 몰라서 묻는 게 아니다.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걸 다른 사람의 입으로 확인받고 싶을 뿐인 때가 많다. 질문의 방향과 뉘앙스를 잘 듣고 있으면 결국 듣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내 입에서 결혼을 후회한다는 말이 나오길 넌지시 기다리고 있는 후배에게는 결혼하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결혼에 대해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민을 하고 있는 이에게도 그가 듣고 싶어 할 만한 답을 해준다. 또는 그의 가치관이나 상황과 좀 더 맞아떨어져서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한다.


아래는 내가 결혼을 하게 된 이유에 대한 여러 버전들이다.  

     

1) 뿌리가 필요해서 결혼했다

여성 둘이 아파트를 사서 동거하는 이야기를 담은 책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의 첫 문장은 이것이다. “‘혼자 사는 게 잘 맞는다’는 말은 10년쯤 그 생활을 지속해 본 후에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이 문장이 오래 맴돌았던 이유는 나 또한 그런 불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방 출신으로 서울에 와서 살면서 지독한 외로움을 느꼈다. 가족은 나를 정 없고 독한 애라 전쟁터에서도 살아남을 애라고 평했는데, 독립적인 인간임에 긍지가 있는 편이었는데, 혼자 서울살이를 한지 오 년쯤 지나고부터는 부레옥잠처럼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느껴졌다. 주말에 ‘동네친구’ ‘고등학교 친구’와 놀았다는 동기들을 부러워하면서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싫었다. 서울에 뿌리내리고 싶었다. 여기에 가족이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세상에 믿을 구석이라고는 나밖에 없다는 비장함을 안고 계속 사는 게 힘겨웠다.

     

2) 이 사람과 함께라면 결혼해도 될 것 같았다

지금의 남편과 이년 정도 연애를 했을 때 교통사고가 났다. 대구에 갔다 운전해서 돌아오던 밤, 양재 현대자동차 본사가 보여 다 왔다고 안심하고 있는데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꺾었다. 운전자가 졸음운전을 해서 우리가 타고 있던 차를 박은 것이다. 그 뒤로는 기억이 선명하지 않다. 구급차가 와서 대학병원으로 나를 실어 날랐고 방광 파열, 골반 골절, 발목 골절, 다리 신경 손상 등의 문구가 적힌 진단을 받았다. 그중 골반 골절이 제일 큰 골치였다. 깁스를 할 수 있는 부위가 아니어서 뼈가 붙기까지 두 달 정도를 꼬박 누워 있어야 했다. 병원에 입원해 있던 사 개월 동안, 남편은 퇴근하고 와서 같이 저녁을 먹고 좁은 간병인 침대에서 웅크려 잠을 잤다. 주말에는 내내 함께 있어주었다. 남편이 회사에 있는 시간에는 당시에는 (남자친구의 어머니일 뿐이었던) 시어머니가 와서 교대하면서 나를 24시간 돌보았다. 가족을 이루는 목적 중 하나가 사적인 안전망을 만드는 거라고 할 때, 그와 함께라면 기댈 수 있을 것 같았다.

     

3) 방이 아닌 집에 살고 싶었다

서울에 와서 처음 살았던 곳은 관악구에 있는 월세 25만 원짜리 하숙집이었다. 단독주택이었는데 1층에는 주인집 내외가 살았고 2층에는 다섯 개의 방이 있어서 그걸 하나씩 차지했다. 화장실은 남녀가 함께 썼다. 신촌의 고시원에 살 때는 죄수들의 징벌방 같은 곳에 월세 40만 원을 주고 살았다. 이후 정규직 직원이 되면서 기숙사를 지원받게 되었고 서대문역 근처에 있는 빌라에서 여성 직원들 네 명이 함께 살았다. 교통사고로 휴직을 하고 병원에 누워있을 때, 같이 살던 언니가 면회를 와서는 앞으로 기숙사 혜택을 없애기로 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소식을 듣고 결혼 날짜를 부랴부랴 잡았다. 남편과 내가 모은 돈을 합치고 시아버지와 은행의 지원을 받아 24평 아파트 전세를 구했다. 결혼을 하고서야 비로소 서울에 방 아닌 집이 생긴 것이다. 방 두개, 화장실 하나, 거실이 있는 집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집을 넓혀가며 이사를 두번 더 했지만 그후로는 그 정도의 기쁨을 느껴보지 못했다.


4) 남자 없이 사는 여성에 대한 차별이 지겨웠다

이런 말을 하면 누군가 또 여자들의 피해의식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러건 말건 피해를 받은 게 사실이니까 쓴다. 4년 정도 살았던 기숙사는 서대문역 근처에 있는 빌라로 회사에서 전세 계약을 한 것이었다. 어느 날, 보일러가 고장 나서 집주인에게 연락을 했더니 그는 원래 보일러는 세입자가 고쳐야 하는 건데 몰랐냐면서 나를 세상 물정 모르는 여자 취급을 했다. 월세라면 고쳐줄 테지만 전세라면 세입자가 고치며 살아야 한다는 거였다. 잘못 알았나 싶어 주변에 조언을 구하고 검색도 해봤더니 보일러는 집주인이 고쳐주는 게 맞았다. 다시 근거를 대며 요청했더니 이번에는 여자들만 살다 보니 험하게 써서(보일러를 어떻게 하면 험하게 쓸 수 있지요?) 고장이 난 거라며 수리비를 반반 부담하자고 했다. 당시 만나던 남자친구에게 한탄을 했더니 그이는 자기가 통화해 보겠다고 했다. 남자친구가 잘못을 지적하자 집주인은 자기가 다 고쳐주겠노라고 선심 쓰듯 말하며 전화를 끊었다. 나에겐 악을 써야 하는 일이 누군가에겐 언성 하나 높이지 않고 해결되는 일인 걸 눈 앞에서 목격하자 허탈했다. 현관에 일부러 가져다 놓은 280mm 삼선 슬리퍼가 지겨웠고 “왜 그렇게 맨날 맞고 살면서 이혼하지 않아?”란 질문에 엄마가 “남편 없이 살면 남들이 무시한다”던 말이 떠올랐다. 물론, 나는 싸우고 싶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미어캣처럼 항상 기웃거리며 누가 공격하지 않는지 경계하며 사는 데 넌더리가 났다.



사진: Unsplash의Alexandra Gornago


돌이켜보면 이 네 가지 이유가 결혼을 결심한 큰 이유였다.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 이유만 빠졌더라도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을까? 확신할 수 없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이 그렇듯이, 당시에는 내가 온전한 주관으로 결심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지나고 나면 타이밍과 운과 경제적 이유 같은 것이 그러한 결정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나를 밀어붙이고 있었음을 느끼게 된다.


2008년에 MBC <우리 결혼했어요>라는 프로그램이 큰 인기를 끈 적 있다. 아내의 발을 씻겨주거나, 눈에 설렘을 가득 안고 알콩달콩 데이트하는 걸 보면서 사람들은 흥미로워하는 한편 결혼생활에 대한 환상만을 부추긴다고 비판하곤 했다.


그때의 미디어가 장점만을 보여줬다면 이제는 공포만을 부각하고 있다. ‘결혼 지옥’ ‘돌싱글즈’ '나혼자 산다' 같은 것만 봐도 이제는 결혼이 불행의 지름길이고 이혼이나 비혼이 유일한 탈출구처럼 여겨진다.


한국처럼 쏠림 현상이 심한 곳에서는 어떤 분위기가 한번 조성되고 나면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말을 더하기 어렵기에 결혼에도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는 자체가 꼰대의 변명처럼 되어버렸다.


부모 세대가 그랬듯 결혼이 필수라고 생각하는 것도 불행이지만 결혼을 골칫덩이로만 느끼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결혼이 더이상 필수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여성의 인권 측면에서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딱히 결혼이 타도해야 할 대상이 될 것도 아니다.


비혼자의 삶이 다양하듯 기혼자의 삶도 납작하지 않다. 결혼 생활을 하면서 평등할 수 있다. 문제가 생기면 대화로 고칠 수 있다. 내가 목격한 결혼식 풍경이 10년도 안되는 사이에 확 바뀌었듯이. 결혼식이 그렇다면 결혼 생활도 그럴 수 있다.


후배들이 어떻게 결혼을 결심했냐고 물을 때 나는 가끔 이렇게 질문한다.


“음, 두 가지 버전이 있어요. 낭만적인 버전이랑 현실적인 버전. 둘 중 뭘 듣고 싶어요?”


그러면 후배들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꼭 이렇게 답한다. “둘 다 얘기해 주시면 안 되나요?”


그러면 나는 조금씩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모두 해준다. 결혼에는 낭만도 있지만 현실도 있으니까. 세상 모든 것이 그러하듯 진실은 복합적인 데 있으니까.


막장 드라마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 말고 평범한 우리들 결혼 생활에 대해서도 좀 더 많이 이야기하면 좋겠다. 결혼한다고 해서 꼭 행복해지는 건 아니지만 결혼한다고 해서 반드시 불행해지는 것도 아니므로 비장함을 좀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저 저마다의 복잡한 상황과 선택들이 있을 뿐이고 우리는 서로를 존중하고 응원하면 되는 것이다. 지나친 선망도 과도한 두려움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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