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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Sep 06. 2023

그건 제 잘못이 아니랍니다

아이의 결과와 나를 분리하기



"에세이를 잘 쓰려면 첫 번째로는 관찰력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또... 평정심이 필요해요"라고 말한 적 있다. 관찰력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못 보고 지나친 일상을 발견하고 자기 방식으로 해석할 수 있으니까 당연히 필요하다. 그럼 평정심은 왜? 기쁠 때는 붕 떠올라 독자에게 가르치려 드는 글을 쓰게 되고, 너무 슬퍼지면 자기 연민에 빠져있는 글만 내리 쓰게 된다고 느낀다. 둘을 경계하려고 일상의 루틴을 정해두고 꼬박꼬박 지키는 편이다. 그런데 작년 상반기에는 두려워서 글을 제대로 쓸 수 없었다. 이유는 아이 때문이었다.


아이는 태어난 지 두 돌을 훨씬 넘기고도 ‘마마(엄마)’ ‘빠빠(아빠)’ ‘응’ ‘아이(아니)’ 정도밖에 하지 않았다. 보통 24개월 정도가 되면 문장으로 말할 수 있게 되고 적어도 50개 이상의 단어를 구사하게 된다고 육아책에는 쓰여 있었다. 주변에서 아들은 원래 좀 말이 늦는 법이라고도 했고, 마스크를 종일 끼고 있으니 서로의 입모양과 표정을 볼 수 없어 다들 조금씩 언어발달이 늦어지고 있다고도 했다.


2022년, 코로나가 여전히 일상을 지배하던 시기에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들은 낮잠을 잘 때조차 마스크를 끼곤 했다. 야외 놀이터에서 놀다가도 마스크가 벗겨지면 어른을 불러 다시 씌워달라고 독촉할 정도로 철저했다. 그런 코로나 시국인 걸 감안하더라도 평균보다 아이는 지나치게 늦되었다.


그즈음 나는 아이 상태를 지나치게 걱정하느라 원래도 있던 불안증이 극에 달해가고 있었다. 스트레스를 받아 밥을 제대로 먹을 수 없게 되자 맞는 바지가 없어서 옷을 새로 사야 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살이 왜 이렇게 빠졌냐고 물어보았다. 불면증도 심해져 아이를 재우고 뒤척이다 보면 아침이 되어서야 눈을 붙이곤 했다. 까무룩 잠들면 꿈속에서는 아이가 재잘재잘 말을 했다. 나는 아이 입모양을 보며 신기해하면서 환호하다가 잠에서 깬 뒤 무엇이 현실인지 헷갈려하며 침대 위에서 어리둥절해했다.


말 잘하는 법에 대한 책을 쓰기로 계약하고 원고를 쓰고 있던 중이었는데 그 또한 진도를 나가기 어려워 마감을 계속해 미루었다. 내 아이가 말을 못 하고 있는데 표현 잘하는 법을 쓰고 있다는 게 (머리로는 그게 상관없다는 걸 알면서도) 참을 수 없이 아이러니했고 사기꾼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엄마가 밖에서만 말 많이 하고 집에서는 피곤하다고 말 안 걸어주는 거 아니야?” “아직 어린데 어린이집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와 비슷한 류의 말을 몇 번 듣게 되자 강의를 줄이게 되었다. 적절한 언어 자극을 주지 않아서 아이가 말을 못 하는 걸 수 있다는 자책이 들었고 그때마다 미안함과 죄책감이 오래된 껌처럼 덕지덕지 엉켜 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반면 남편은 느긋했다. 할 때가 되면 어련히 할 테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그가 느긋해할 수 있는 것이 부러우면서도 짜증이 나서 그 주제로 대화하는 걸 그만두었다.


인터넷에 ‘두 돌 아이 언어 발달’을 검색해 보면 또박또박 완벽한 문장을 구사하는 아이들이 넘쳐났다. 그런 영상을 본 다음에는 언어 발달에 도움이 된다는 장난감이나 책을 사곤 했다. 강박적으로 책을 읽어 주었으며 수시로 동요를 틀어두었다. 어느 날인가는 한 번에 이백만원이 넘는 전집을 사기도 했다. 정보가 많아질수록 불안이 심해지고 불안이 심해지면 과소비를 하게 된다. 아이가 잠들면 스마트폰으로 찾아보고, 사고, 찾아보고, 사고를 반복했다.


말이 늦으면 자폐증을 의심할 수 있다고 해서 이와 관련된 정보 또한 거의 매일 찾아보았다. 걱정의 눈으로 아이를 보게 되니 자동차를 좋아하는 것, 한번 집중하면 불러도 대답 않는 것, 숫자세기를 좋아하는 것도 개성이 아닌 증상으로 보였다.


처음엔 36개월까지는 기다려보자고 생각했으나 천장 벽지가 누수로 젖어가는 걸 지켜보는 듯한 기분이 들어 30개월이 되자마자 아이 손을 잡고 언어치료 센터로 갔다. 코로나로 언어 발달이 늦어진 아이들이 많아 유명한 센터는 예약 잡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았다.


선생님은 아이를 관찰하더니 또래보다 일 년 정도 지연된 상태라고 진단하며 일주일에 두 번씩은 와서 언어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 후 나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아이에게 주로 어떤 식으로 말을 거는지, 아이와 뭘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후 그는 마지막으로 물어보았다. 혹시 <무례한 사람에게 웃으며 대처하는 법>의 작가 아니냐고. 책을 읽었고 유튜브에서도 보았다고.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라서 마스크를 끼고 있는 게 다행이다 싶었다. “엄마가 밖에서만 말 많이 하고 피곤해서 집에서는 말 안 걸어주는 거 아니야?” 같은 농담조의 비난이 또 떠올랐다. 선생님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할까 봐 두려웠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 같은 상태가 되어 나는 두서없이 변명했다. 그때 나는 내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결국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의심을 거둘 수 없어 더욱 극렬히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선생님, 저는요. 진짜 이유를 모르겠어요. 애가 왜 이렇게 늦는지 모르겠어요. 저 정말 최선을 다하고 있거든요. 매일 책도 열 권 넘게 읽어주고요. 영상도 안 보여주고요. 아주 일찍 데리러 가진 못하지만 그래도 다섯 시 전에는 꼭 하원시키고 자기 전까지 집중해서 놀아주고 있어요. 제가 도대체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요?”


선생님은 눈을 크게 떴다. 그저 알고 있는 책의 저자를 만나 반갑다고 말하려 했을 텐데 내가 갑자기 당황해서 주절대니 본인도 놀랐으리라. 아이는 센터 안에 있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아이를 포함해 셋만 있는 치료실에서 선생님은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 심호흡을 했다. 우리는 잠시 눈을 맞추었다. 선생님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비밀스럽고 은근한 말투였다.


“저희 아이도 19년생이에요. 말이 많이 늦어서 언어치료를 받고 있어요. 저 말고 다른 동료 선생님께 보내고 있어요. 엄마가 잘못해서 아이가 늦는 게 아니에요.”


아이를 걱정하는 한편, 나는 내가 비난받을 것이 두려웠던 것 같다. 엄마 노릇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까 봐 무서웠던 것 같다. 그 말이 큰 위로가 되었던 건 그래서였다.




사진: Unsplash의Zach Reiner



그로부터 육 개월 정도가 지난 때였다. 한 여름에 태어난 아이가 세 돌을 맞이한 기념으로 뽀로로 케이크를 나누어 먹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어디론가 향하던 차 안에서 아이는 카시트 위에 앉아 우유를 쪼르륵 다 마셨고 빈 우유갑을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일단 그걸 차 손잡이 안에 집어넣어두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아이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검지손가락으로 빈 우유팩을 가리키며 말했다. “우유 이거 다 먹었네?” 


“먹었네”는커녕 “이거”도 안 하던 아이가, 완전한 문장으로 상황에 맞는 말을 하는 모습에 얼이 나가버렸다. 그때 알았다. 지금 이 순간이, 죽기 전까지 아이에게 전래동화처럼 반복할 환희의 순간이 되리라고.


도대체 그동안 어떻게 참았나 궁금할 정도로 아이는 매일 어제보다 더 많이, 더 길게 말했다. 첫 문장이 터지고 며칠 지난 뒤부턴 길거리의 간판이나 안내문을 읽어 나를 놀라게 하더니 이후엔 혼자 책을 낭독하면서 노는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글자를 익히면서 자신감을 가지게 되어 말이 터진 것 같았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완벽주의 성향이 보인다고, 뭐든 스스로 마음의 준비를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라고 조언해 주었다.


요즘 내 일상의 기쁨 중 하나는 아이의 말을 수집하는 일이다. 유독 반짝이는 것들을 기록해 둔다. “안전벨트 착 매듯이 안아주세요” “솜사탕 같은 구름이 와르르 쏟아져요” "내가 백 살 되면 엄마 목마 태워줄게요"같은 말을 메모장에 적어둔다. 그리고 수시로 그걸 열어보면서 혼자 배시시 웃곤 한다.


‘아이는 자기만의 속도가 있으니 그걸 기다려주면 된다’는 말을 쓰기 위해 이 글을 쓰진 않았다. 그저 나는, 아이의 더딤이 엄마와 반드시 상관이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이의 늦음이 엄마와 큰 상관이 없는 거라면 반대로 아이의 빠름도 엄마와 큰 상관이 없는 것이겠지. 아이가 느려서 답답할 때도, 아이가 잘해서 뿌듯할 때도 그런 생각을 하면 조금은 침착해진다. 내 잘못도 덕택도 딱히 아닌 채 아이는 자기의 길을 간다.  


“제가 언어치료사인데요, 우리 아이도 언어치료를 받고 있어요”라는 말이 주었던 위로도 다시 생각한다. 나도 이제는 분리해서 말할 수 있다. “제가 글 쓰고 말하는 일을 하는데요, 우리 아이가 말이 참 늦었어요.” 제일 만만한 게 스스로를 미워하는 일이고 자책이 습관인 사람들에게도 분명한 목소리로 말해주고 싶다. 나는 크게 한번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입을 뗀다. “아시겠지만, 그건 우리 잘못이 아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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