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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Aug 29. 2023

뛰고 싶지 않은데 뛰어야 하는 기분

“어… 뭐야, 뛰어야 하는 거였어?”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는 평소처럼 걷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들이 쌩 달려가 추월당해버리는. “어… 뭐야, 뛰어야 하는 거였어?” 뒤늦게 당황하며 뛰어가 보지만 아득하게 뒷모습이 멀어지는.


“복기해 보면 옛날에는 내 생각이 다 맞다고 판단한 시기가 있었거든요. 그 시기가 어느 정도 지나고서 몇 년 전부터는 ‘나와 세상의 싱크로가 안 맞는구나’라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나영석 피디가 침착맨이 진행하는 유튜브에 출연해서 한 말이다. 곱씹어보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는데 유독 그 말이 찌릿했던 건 (그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나 또한 몇 년 전부터 ‘세상과 싱크로가 틀어지기 시작하는구나’라고 생각되는 순간들을 겪으면서인 것 같다. 


그건 단순히 트렌드에 뒤쳐진다는 자각일 수도 있고, 결과물에 대한 반응이 점점 예측이 어려워져서이기도 할 테고, 후배와 커뮤니케이션할 때 마음에 턱턱 걸리는 일들이 자꾸 생겨서이기도 할 것이다. “요즘은 다들 이렇게 하잖아요” 같은 말을 들을 때 신기해하는 빈도가 점차 늘어난다.


특히 내 경우에는 세상의 기본값이 변하는게 보이는데, 아니 이미 변해버렸는데, 언제부터 진입해야 하는 지 몰라 엉거주춤 서있는 기분이 드는 지점이 주로 길이와 속도에 있다. 모든 것이 너무 휙휙 지나가버린다. 듣는 것이, 보는 것이, 읽는 것이 너무나 빠르고 짧아진다. 


다양한 분야의 연사들이 18분간 발표하는 미국 TED의 영향을 받아서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이 2011년 한국에 론칭했을 때 사람들이 보이던 주된 반응은 이랬다. “겨우 15분 동안 뭘 한다고?” 15분이라는 시간은 진지하고 전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엔 너무 짧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한편 그렇기에 더욱 사람들은 환호했다. 강의를 ‘고작’ 15분의 시간만 집중해서 보면 된다는 게 혁신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유튜브의 세계에서 15분은 스킵 없이 보기엔 부담스러운 길이로 여겨진다. 


최신음악을 들을 때도 자꾸만 짧아지는 길이를 실감한다. 지난해 가을, 미처 뉴진스를 모르고 있었을 때 친구가 ‘뉴진스’라는 괴물 신인이 빅히트를 쳤다고 알려주었다. “그렇게 힙하다고?” 물었더니 친구가 답했다. “어느 정도냐면, 우리 때 원더걸스 전성기랑 비슷하다고 보면 돼.” 나는 콧구멍을 씰룩거리며 반박했다. “원더걸스 인기 정도인데 내가 모른다고? 원더걸스면... 장기자랑하러 나온 다섯 팀 중에서 네 팀이 원더걸스 춤추고 그랬는데. 어딜 가든 원더걸스 음악이 흘러나오고 그랬는데. 뉴진스가 그 정도라고?” 친구는 단호하게 말을 끊었다. “어. 그 정도야. 지금. 그냥 빨리 들어.”


비장한 심정이 되어 뉴진스의 음악을 공부하듯 들었을 때 새삼 체감한 것 중 하나는 음악이 참 짧다는 거였다. 음악을 재생하자마자 인트로 비트가 찰나처럼 흐른 뒤 곧바로 목소리가 흘러나오는데 그 안에서 다채롭게 기교가 움직이면서 잠시도 지루해질 틈을 주지 않는다. 


뉴진스 음악을 들으며 ‘왜 이렇게 길이가 짧아?’ ‘본론으로 곧장 가네?’라고 느꼈던 건 내가 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에 주로 음악을 들었기 때문일 거다. 사람의 귀는 보수적이다. 평균 나이 33세가 되면 신곡을 찾아 듣지 않는다는 연구결과가 있을 정도니까. 내 대중음악 귀는 가장 예민하게 음악을 듣던 스무 살 언저리로 설정돼 있을 테고, 당시 음악 길이는 대개 4-5분 정도였다. 


이제는 앞부분에서 곧바로 사로잡지 못하면 다음 노래로 미련 없이 넘어가기 때문에 최대한 앞쪽에서 현란하게 멈춰 세워야 하는 것 같다. 그러려면 전주부터 최소한으로 줄여야 한다. 4-5분 정도이던 대중음악 길이는 2023년이 되어 거의 3분을 넘지 않게 설계된다. 그 간극이 내게는 여전히 ‘훅 들어온다’는 체감이 들게 하는 듯하다.  



사진: Unsplash의Nick Reynolds



한 라디오 PD와 이야기를 하다가, 라디오 사연이 예전에는 너무 길게 와서 그걸 작가가 짧게 편집하는 게 일이었는데 요즘은 너무 짧게 와서 살을 붙이는 게 일이라는 말을 들었다. 내가 진행하는 글쓰기 워크숍에서도 세대 차이를 느끼는 가장 큰 부분은 분량에 있다. 에세이를 써오게 한 뒤 합평을 하는 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지는데, 에이포 종이 기준으로 두 장 정도를 써오라 공지한다. 그보다 좀 덜 써도 되고, 두 장을 넘어도 된다고 안내를 하는데, 거의 예외 없이 이십 대 수강생들은 한 장 반을 넘지 않는 분량으로 에세이를 써온다. 


나는 요즘 에세이를 쓸 때 에이포 종이 세 장 안에 갇혀버린 것 같다. 그 이상을 넘기면 사람들이 싫어할 거라는 생각, 끝까지 읽어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글의 분량을 예민하게 점검한다. 줄이고 생략하고 나누고. 그러나 글의 길이는 사유의 길이에 비례할 때가 있다. 어떤 이야기는 생략되지 않고 생략되어서도 안 될 때가 있다. 그걸 알지만 언젠가부터 에이포 세장이라는 문턱을 넘는 건 두려운 일이다 못해 금기로까지 여겨진다. 


글을 쓸 때만 그런 게 아니다. 말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상대가 지루해할까 봐 결론부터 말하고 요약해서 말하면서 눈치를 살핀다. 다들 여기저기서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 같다. 


빨리 말해! 짧게 말해! 지루하지 않게 말해! 나 집중력 없는 거 안 보여? 


2017년 즈음 유행하기 시작한 TMI(Too Much Information)라는 말이 떠오른다. 불필요한 정보량이 많다고 느낄 때,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소소한 이야기를 들어야 할 때 상대에게 그만하라는 뜻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용어였다. 어떤 유행어가 생겨나면 사람들은 그에 맞춰 자신을 검열하게 되기 마련이다. 이 말이 널리 쓰이기 시작하며 친한 관계에서조차 이야기 도중 “잠깐만, 나 방금 너무 티엠아이였지?”라고 묻는 경우가 생겨났다. 


짧아야 하고, 구구절절하지 않아야 한다는 방향으로의 배려(?)가 늘어나면서 복잡한 뉘앙스와 우여곡절이 점차 실종되고 있다. 인스타그램에 글을 열 줄 이상 올리면 구질구질하게 보인다는 인스타그램 사용 설명법을 어디선가 본 뒤 내 인스타그램 피드를 쭉 본 적 있다. 세상에. 그렇게 구질구질할 수가 없었다…. 일상에서의 말하기에서도 사진 한 장을 공유하고 ‘대박!’ 하는 식으로 잠깐의 기분만 공유하는 순간이 늘어나는 걸 본다.


콘텐츠 범람의 시대, SNS로 인한 과잉 연결의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감각이 증가한다. 음악은 전주가 생략되고, 드라마 속 주인공마저 실패를 통해 성장하는 구간이 축약된 채 (고구마 구간을 줄이고) 빨리 성공해야 하고, 콘텐츠는 흥미진진한 요소로만 가득해야 한다는 압박이 주어지고 있다. 그런 콘텐츠를 만나면 무언가 보긴 했는데 공허하고, 줄거리는 알지만 그걸 아는 데에만 그치는 찝찝함이 남는다.  


최근 친구 세 명과 함께 강릉으로 당일치기 여행을 갔다. 각자 사는 것이 바쁘니 계절마다 한번만이라도 보자고 약속한 사이였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걸 꼽아보니 네 달 만이었다. 새벽 6시에 서울역에서 만나 밤 9시에 강릉역에서 헤어졌는데 그 사이 두끼의 식사를 함께 했고 커피를 마셨고 경포호수와 강문해변을 보며 산책했다. 


시간이 별로 없으니 빨리 말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고, 일단 결론만 말하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우리는 느긋하게 걸으면서 고민을 말했다가 가족 이야기를 했다가 미래 이야기를 했는데 소재가 파편처럼 파바박 튀었다. 요약되지 않는 이야기를 풍선처럼 한 손에 들고 다니며 우리는 끝없이 말을 이어갔다. 


객관적으로 보면 TMI 자체인 이야기, 하나마나한 이야기, 끝까지 들어야만 결론을 알 수 있는 이야기, 대화 그 자체가 목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오랜만에 깊은 친밀감을 느꼈다. 요즘 나는 사람들을 만날 때 자주 보지 않더라도 한번 볼 때 길게 보자고 제안하는 중이다. 계절을 느끼면서 함께 걷자고 말하는 중이다. 관계의 질은 빈도가 아니라 밀도에 있으니까. 


이처럼 길게 말해도 괜찮은 사람을 더 많이 옆에 두고 싶다. 당신이 궁금하다고, 부디 자세히 말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사람들과 오래가는 인연을 맺고 싶다. 긴 호흡의 책을 더 많이 읽고 또 쓰고 싶다. 영화관에 가서 휴대폰을 비행기모드로 해두고 두시간 넘게 스크린에만 온전히 몰입하고 싶다. 


"너무 빨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를 외치며 허둥지둥하는 나는 새 시대에 적응하지도, 외면하지도 못하고 멀뚱거리며 기웃대는 중이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가끔 구닥다리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예전엔 분명히 세상의 변화가 너무 느려서 답답하다고 느꼈던 적도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부터 이렇게 멀어져왔을까? 나는 이 속도에 언젠가는 적응할 수 있을까? 적응을, 해야겠지?


매일 밤 침대에 누워 숏폼 콘텐츠를 소비하는 한편 <잃어버린 집중력>이나 <도파미네이션>을 읽고 반성하는 또래들을 볼 때마다 말을 걸고 싶었다. 당신에게도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는 일이 버겁게 느껴지느냐고 묻고 싶었다. 따라가야 한다는 강박과 얕아지는 것 같은 깊이에 종종 서글퍼지는지 묻고 싶었다. 당신은 지금을 어떻게 체감하느냐고 묻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이 글을 에이포 용지 세장을 넘지 않게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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