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여자탐구생활> 1화 -下-
“정리 안 하는 친구를 물 수밖에 없던(?) 우리 아이 답답한 마음도 이해가 간다”는 공감 과잉의 언어를 마주하자, 유치원 선생님이 왜 전에 ‘편식하지 않게 가르치겠다’는 말조차 조심스럽게 해야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후 초등교사로 일하는 친구와 대화하며 그때 느낀 황당함에 대해 말했더니 그가 말했다. 그런 이들이 절대 일부가 아니라고. 친구는 덧붙였다. “요즘은 ‘내 아이 상처 주지 않기’가 지상 최대 명령이야. 다른 아이들이 피해를 보고 있어서 이야길 하면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 아이 마음도 이해해 주세요’ 라거나 ‘선생님이 너무 엄하신 것 같아요’ 한다니까.”
그러한 지적에서 나는 과연 자유로운가? 아이를 대할 때 지나치게 전전긍긍할 때가 있다. 임신한 걸 알게 된 후부터 각종 육아서를 섭렵하고 부모 교육을 받으러 다니며 좋은 엄마가 되기를 꿈꿔왔다. 자녀를 귀한 손님처럼 대접하고 싶었다. 고속도로를 달리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흙먼지가 풀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가는 건 앞장서서 줄여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이런 데에 왜 이토록 몰두하고 있는 것일까?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결과가 항상 선하지는 않은 법이다. 가족관계학과 상담심리학을 전공한 교사 앤절린 밀러는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둔 엄마다. 교육학에 대한 이론적 배경이 있는 데다 가족을 최우선으로 살아가는 그녀는 늘 웃고, 친절하고, 관대하고, 문제가 생기면 척척 해결해 낸다. 가족이 상처받지 않게 하려 줄곧 애써왔으나 그 모든 노력의 결과는 가혹하다. 습관성 우울 증세를 보이는 남편, 분열 정동 장애 진단을 받은 아들, 불안증과 우울증을 겪는 딸….
앤절린 밀러는 책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원제 : The Enabler : When helping hurts the ones you love)>에서 자신이 바로 인에이블러(Enabler)였다고 규정한다. 인에이블러란 ‘사랑한다면서 망치는 사람’이라는 뜻의 심리학 용어로, 다른 사람의 책임을 대신 떠맡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는 사람을 뜻한다.
부모라면 자녀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 줌으로써 의존적으로 키우게 되고 연인 관계라면 불완전한 상대를 돕는다는 명목을 앞세워 기대게 만든다. 모든 것을 대신 앞장서해주면서 다른 이가 자립하는 걸 막는 것이다. 앤절린 밀러는 아이들이 스스로를 자신만만하고 유능하다고 느끼며 성장하기를 바랐다고, 그런 마음 때문에 아이의 특이한 행동을 눈 감아주고 용서해 주고 바깥세상과 거리를 유지하며 보호하려고 애쓰면서 살아왔다고 말한다. 마침내 그는 고백한다. 그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가족을 망치고 있었음을 인정하노라고.
책에는 또 이런 표현이 나온다. ‘경쟁적인 세상에서 독립하려고 몸부림치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겹지만, 부적절한 부모의 유형을 경험한 아이들에게는 특히 더 어렵다’고. ‘부모의 생활 방식을 마음에 깊이 새긴 나머지, 이와 다른 환경에서는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고. 내 부모에게 받은 대로 자식에게 하지 않을 거야,라고 결심하나 정작 다른 환경이 주어졌을 때 자신이 부모로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해 실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든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기가 잘 아는 결핍을 주지 않으려 한다. 아끼는 사람일수록 내가 부러워했던 환경을, 받고 싶었던 대우를 그대로 전해주고 싶어 한다.
나는 궁금했다. 80년대생이 육아를 하며 ‘아이 마음 존중하기’에 집중하고 있다면 그 이전 세대는 어땠을까? 이전 세대 부모에게는 무엇이 결단코 전달해주고 싶지 않은 결핍이자 콤플렉스였던 걸까?
80년대생의 부모는 대개 60년대생이고 그들의 부모는 주로 40년대에 태어났다. 대부분이 보릿고개를 겪어야 했던 당시 한국인의 소원은 흰쌀밥 한번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었다. 나의 할머니도 그 사무쳤던 기억 때문에 손주들이 밥을 남길 때면 벌 받는다고 눈을 부라리며 큰 소리를 냈다. 도시락을 싸가기 어려워서 물로 배를 채우거나 산에서 채취한 것들로 죽을 끓여 먹던 세대는 부모가 되며 아이에게만큼은 배곯은 설움을 물려주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그러한 의지와 맞물려 ‘우량아선발대회’는 1970년대에 엄마들의 큰 관심과 호응 속에서 치러진다. 대회에서는 머리가 크고 체중이 많이 나갈수록 유리했다. 뚱뚱하고 배 나온 사람이 부자로 여겨지던 시절, 모유를 먹는 것보다 분유를 먹는 게 더 살이 빨리 붙기 유리하기에 엄마들은 앞다투어 분유를 먹인다(‘우량아선발대회’는 분유 회사의 후원으로 이루어졌다). 모유를 먹이는 사람들은 돈이 없어 분유를 사주지 못하는 것처럼 비치며 죄책감을 갖게 되기도 했다 한다. 아이를 통통하게 살찌워 부자처럼 보이게 하는 것, 그 시대 부모들의 가장 큰 로망이었다.
1960년대생은 부모와 달리 굶었던 결핍이 크지 않다. 경제가 빠르게 성장하면서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국민소득이 높아진 덕이다. 대신 이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는 것은 ‘학벌 신화’다. 소를 팔아 보낸다고 해서 대학이 ‘우골탑’이라 불리고 위아래로 형제자매가 줄줄이 딸려있는 상황에선 상고나 공고를 졸업하고 하루빨리 취업을 하는 게 장려되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어도 대학에 갈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이들이 다수였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학 진학률이 이십 퍼센트 대에 불과했으니, 대학생은 그 자체로 특수한 신분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대학졸업증이 있으면 출세하기 쉽다는 것을 목격한 평범한 부모들과 몸소 학벌의 덕을 본 상류층은 열렬히 자녀들의 사교육에 매진한다. 육 남매가 평균이던 자기 세대와 달리(1960년대 초만 해도 합계 출산율이 6명이었다) 이젠 자식이 보통 두 명, 많아야 세명이니 가능해진 투자이기도 했다.
과외 금지령이 해지되고, 학원 수강이 자율화되고, 명문 고교가 강남으로 대거 이전하고, 사는 곳에 따라 학교를 배정받는 학군제가 생기며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대치동 학원가가 생성되었다. 자녀 교육에 매진해 입시 성공 노하우를 알려주며 사교육 시장의 큰 손이 된 ‘돼지엄마’도 이때 등장한다. 이 시기 베스트셀러 육아서의 주된 내용은 ‘나는 이렇게 아이를 서울대에 보냈다’였다. ‘자식 잘 키웠다’는 평가를 받으려면 일단 자녀를 명문대에 보내야 했다.
80년대생들은 ‘좋은 대학에만 가면 인생이 바뀐다’는 사회적 압박 속에서 본격적으로 대입 레이스에 뛰어들게 된다. 부모 세대와 달리 대학 진학은 필수가 되었다. 그 결과 80년대생이 대학에 입학하기 시작하는 시기인 2000년부터는 대학 진학률이 칠십 퍼센트에 육박하더니 2005년부터는 팔십 퍼센트의 벽을 넘어선다.
고등학교에서는 군대식 문화와 체벌이 여전히 남아있었고 0교시, 야간자율학습, 명문대 준비반 같은 것을 경험한 80년대생이 대학에 진학했을 때는 동아리 같은 공동체 문화가 거의 사라져 있었다. 대학 1학년 때부터 학점관리를 시작한 80년대생은 ‘스펙’이라는 용어를 기계가 아닌 사람에게 처음으로 사용한다. 이 단어는 출신대학, 학점, 토익, 대외활동 같은 것들을 합쳐 취업 시장에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용어로 이후 널리 사용되었다. 경쟁에 익숙한 80년대생은 학벌주의, 개인주의, 자본주의의 본격적인 서막을 십 대부터 함께해 왔다.
이제 80년대생의 가장 큰 결핍은 부모처럼 대학에 못 간 한이 아니고, 조부모처럼 밥 못 먹은 한이 아니고, 공부만 잘하면 된다는 목표에 밀려 마음을 배려받지 못했다는 한에 있다. 그걸 섭섭해하면서도 마냥 서운해 할 수가 없었다. IMF로 인한 충격을 정면에서 맞은 부모 세대가 당장의 생존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런 부모의 희생을 알기에 더욱 속마음을 꽁꽁 감추어야 했다. 대학에 가면 해야지, 취업하면 해야지, 같은 식으로 행복을 언제나 나중으로 유예하는 게 습관이 된 채 어른이 되었다.
한편 어른이 되면서 깨달은 건 부모가 그토록 강조했던 성공 방정식이 틀렸다는 것이었다.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안정적인 직장을 얻거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공부만 잘하면 인생이 탄탄대로라고 배웠는데,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해서 성공하는 방법이 너무나 다양해진 것이다. 80년대생은 학벌 신화에 대한 믿음과 노력에 단단히 배신당한 첫 세대이므로 자기가 들었던 것처럼 자식에게 일단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 말할 생각이 별로 없다.
또한 권위적인 부모 세대에 질려버린 80년대생들은 자녀와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 한다. 자녀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2006년 방영한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와 2020년부터 시작한 ‘요즘 육아 금쪽같은 내 새끼’에 출연한 오은영 박사는 그러한 마음을 품고 있던 젊은 세대로부터 특히 열렬한 호응을 얻는다. 이제 막 부모가 된, 이제 어른이 된 사람들은 오은영 박사가 아이를 대하는 모습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나도 부모로부터 저런 존중을 받아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나 어느 순간 ‘아이 마음 읽어주기’가 ‘아이 마음 상하게 하지 않기’로, ‘아이 존중하기’가 ‘아이 떠받들기’로 변질되며 특히 교육기관에서 그로 인한 문제가 왕왕 발생하고 있는 듯하다.
마음에 가리어진 분홍색 베일을 걷어본다.
사랑하니까, 잘 아는 슬픔을 주지 않고 싶었다.
사랑하니까, 덜 힘든 지름길을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키우고 싶었던 아이의 모습은 어린 시절 부러워하던 이들의 캐릭터에서 여기저기 따온 것이었다.
영어 회화를 잘하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영어 독해는 그럭저럭 하면서 외국인만 보면 경직되니까 그랬다.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는 걸 봐왔기에, ‘버터발음’인 해외 유학파 친구들을 부러워했기에 그랬다. 취업 준비를 할 때 토익 점수를 만들고 갱신하는 게 스트레스여서 그랬다. 최근 영어유치원이나 '엄마표 영어 교육법' 등 영어 조기 교육이 인기인 데에는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이들의 속상함이 큰 이유일 거라 짐작한다.
취미가 많은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미술이나 음악에 축적된 안목이 있는 사람을 보면 뿌리 깊은 귀족 같아 보여 위축되었다.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거 말고는 취향이랄 게 없어 부끄러웠던 기억 때문에, 스무 살이 넘어 스키장이나 공항이나 미술관이나 공연장에 처음 갔을 때 긴장했던 기억 때문에, 어릴 때 피아노 학원이나 태권도 학원이나 발레 학원에 가는 친구들을 보면 부러워서 그랬다.
분노와 트라우마가 없는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아빠는 엄마를 수시로 때렸고 가족이 함께 보던 드라마에서조차 남자가 여자를 때리는 장면이 자주 나왔다. 여기저기 폭력이 난무했는데 '가정폭력'이라는 말 대신 ‘부부싸움’이라고 뭉뚱그렸던 시대를 찡그리며 건너왔다. 선생님만 중앙계단으로 지나다닐 수 있다는 식의 납득하기 힘들고 권위적인 문화가 여기저기 남아있던 시절, 장식 없는 까만 구두를 신고 귀밑 삼 센티를 넘지 않게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으면 몽둥이로 맞아서 그랬다. 말해도 바뀔 게 없다는 체념부터 배워서 그러했다.
내가 간절히 원했던 바로 그 유년 시절을 아이에게 주려고 하다가 무리하는 자신을 본다. 최소한 잘 알고 있는 상처는 주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마음 때문에 과도하게 아이를 보호하거나 불안해하는 건 아닌지 바라본다.
결핍을 주지 않으려 노력하는 자체는 나쁜 일이 아니지만 지나치게 몰두해 폭주하다 보면 목적지를 지나쳐버릴 수 있다. 사람을 무균실 안에서 키울 수는 없다. 누구든, 어떤 세대든 겪고 지나가야 하는 시련이 있다.
자신이 인에이블러였다고 고백하는 앤절린 밀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에이블러는 자기 마음의 어두운 구석을 파고 들어가 스스로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믿음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자신이 변화시키고 싶은 행위의 원천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야 한다고. 그는 또 말한다. “우리는 완벽할 필요도 없고, 초인적 영웅이 될 필요도 없다. 누구나 잘못을 저지르기 쉽다.”
변화는 일단 나의 결핍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한다. 완벽할 수 없고, 영웅이 되지도 못하겠지만, 잘못과 실수와 오해를 인정하는 데서부터 바뀔 수 있다.
사랑하면서, 사랑한다는 이유로 행하는 것들이 외려 상대를 망치고 있지는 않은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산을 씌워주겠다고 나서다가 성취감과 독립성을 빼앗거나 회피 성향을 키우거나 나르시시스트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사랑하는 이에게 우리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한풀이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