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컬한 사람들이 있다.
시니컬하다는 건 단순히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라, 중요하거나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이 세계를 인식하는 데서 시작한다. “해봤자 안 되더라. 그러니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시니컬한 사고의 기본 구조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향성이나 내향성처럼 타고나는 경향이 큰 성격과 달리, 시니컬은 경험에 의해 학습되고 강화된다. 날 때부터 시니컬한 사람은 없다. 시니컬은 혹시나가 역시나가 되었던 기억들, 기대했던 일에 대한 연이은 실패에서 자신을 보호하는 방어기제이기 때문에.
유년 시절 어른들이나 어른들이 보여주는 책과 영상은 모두 이렇게 말했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정의가 승리한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으며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 “가난은 불편한 것이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도 <바른생활> <도덕> <윤리> 등을 통해 공공의 의무와 책임, 법과 공중도덕을 배운다.
그러나 아이들은 성장하며 하나씩 깨닫는다. 노력은 가끔 (심지어 자주) 우리를 배신하며, 세상은 불합리와 불의로 가득하다는 것. 세상에는 추한 것과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 투성이며 가난은 불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학교에서 배웠던 세상과 현실의 괴리를 깨닫는 과정에서 사람들은 마음에 깊은 내상을 입게 된다. 더 이상 상처 받지 않는 방법은 더 이상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시니컬함은 말로써 “안될 거야”라고 하는 것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아등바등하는 모습과 결국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거봐, 내가 그럴 거라고 했지”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세상 물정을 잘 아는 현명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상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니컬은 시크와 동의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시니컬은 쿨하지도 시크하지도 않다. 그 자체로는 아무 힘이 없을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한 동력마저 희석시킨다. 세상을 밀고 가는 것은 그래도 나아질 수 있다는 긍정이며, 세상을 바꾸는 것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분노다.
무조건적인 긍정이나 분노는 칼처럼 위험하지만 시니컬은 무력하기만 할 뿐이다.
시니컬한 사람들은 “바뀌지 않을테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건 틀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바뀐다.
천천히 아주 확실하게 나쁜 방향으로.
시니컬은 패배감을 공동체에 퍼트리고 무기력을 포자처럼 옮긴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내가 선거철만 되면 듣던 말이 있었다. ‘어차피’로 시작하는 3종 세트랄까. “어차피 야당을 뽑으면 사표가 된다.” “어차피 20대는 투표하지 않는다.” “어차피 대구는 새누리당 깃발만 꽂으면 당선된다”는 식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구는 30년 여당 텃밭으로 알려져 있으며, 한국은 특정 지역의 패권주의 정치 구도가 유지되어 왔다. 2008년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역주의를 뛰어넘겠다며 대구 수성구에 도전했을 때 32%로 65%를 얻은 여당의 주호영 의원에게 크게 지고서도 ‘선전했다’는 평을 들었던 건 그때까지만 해도 대구.지역 야권 후보의 지지율은 대개 10% 정도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최근 대구에 갔을 때 아빠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대구도 무작정 1번만 뽑지 않는다.” 2016년 4월, 20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는 그것을 사실로 증명해 보였다. 대구의 강남이라 불리는 수성구에 출마한 더불어민주당 김부겸 후보가 62.3%를 득표해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를 크게 이겼다. 이번 총선에서 수성구는 대구에서 가장 높은 투표율을 기록했는데, 이는 대구 평균 54.8%보다 9.2%나 높은 수치다.
김부겸 후보는 경기도 군포에서 내리 3선을 지냈지만 지역주의를 타파하겠다며 고향인 대구로 왔다. 그는 2012년 19대 총선과 2014년 시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번번이 낙선했다가 이번 선거에서 31년만에 처음으로 대구의 야당 정치인이 되었다.
언론은 이에 대해 ‘반란’ ‘기적’ 등의 표현을 쓰며 놀라움을 표현했다. 나 또한 ‘대구 사람’으로서 결과 앞에서 큰 충격을 받았다. ‘대구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한참 생각하던 나는, 나부터도 대구의 정치 성향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고 냉소하고 있었음을 새삼 알게 되었다.
주변을 둘러보면 시니컬해지기 너무나 쉽다. 연애, 취업, 결혼은 자연스러운 인생의 수순이 아니라 간절히 바라고 노력해야 하는 꿈이 되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뜻의 N포세대, 헬조선, 흙수저, 갑질 등의 부조리한 말들은 이제 식상하기까지 하다.
청년의 대다수는 대학 졸업 후 비정규직이 되거나 물가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게 된다. 좋은 일자리는 극소수에게만 돌아가며, 그조차도 앞으로는 더욱 줄어들 것이 자명하다.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고 세상이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긍정적 기대를 가질 수 있었던 세대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마지막이었다.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에 대한 대응이 염세로 빠져버리면 나빠질 일만 남는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아예 대화하지 않게 되듯, 변화에 대한 희망이 없으면 세상에 대한 어떠한 액션도 취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이 같은 ‘해봤자 안 되니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은 역사적으로도 지배 이데올로기를 공고히 하는 무기로 사용되어 왔음을 알아야 한다.
친일파 이완용이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뒤 그에 대한 경고문을 「매일신보」에 기고했는데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당신들은 지금 세계의 대세를 알지 못하고 민족을 멸망케 하는 경거망동의 행동을 하고 있다.” “아무리 시위해봤자 소용없다. 그냥 포기하라. 어차피 잠깐 타오르다가 말 것이다.” “그저 조용히 기다려라.”
청소하지 않고 집을 비우면 집은 더러워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먼지가 쌓이고 하나둘 고장이 나기 시작한다. 매일 쓸고 닦아도 청소한 티가 나지 않는 것 같지만 집은 그 덕에 최소한 더 나빠지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분노하고, 불만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어릴 때 우리가 배웠던 것처럼 아름답지만은 않은 세상이지만 ‘그래도 혹시’의 마음만은 잃어버리지 않도록. 최선이 없다면 차선을, 차선이 없다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절실함만이 최악만은 막을 수 있게 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반 인종차별주의자, 반전주의자, 페미니스트 등 과거의 이상주의자들이 간절히 꿈꿨던 세상이기도 하다. 세상을 무조건적으로 긍정하잔 말이 아니다. 시니컬해지지 말자는 건 철저하게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의 리얼리티로 돌아와서 용기 있게 현실을 직시하자는 뜻이다.
그렇다면 최소한, 세상은 바꾸지 못하더라도 내 인생과 내 주변은 뭐라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