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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May 13. 2016

나의 진짜 사이즈


한동안 내 가슴 사이즈가 A컵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엄마가 그게 내 사이즈라고 말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브래지어를 하기 시작했는데 엄마가 내게 맞는 거라며 A컵의 브라를 사다 주었다. 한 살 위의 언니도 나와 같은 사이즈의 브라를 하고 다녔다.


이상하게 브래지어를 하면 등과 옆구리 사이로 살이 삐져나오고 앞가슴은 꽉 끼어서 조이고 답답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브래지어 끈을 양옆에서 잡았다 놓았다 했다. 브래지어를 풀고 나면 가슴에 브라를 했던 자국이 오래 남았다. “엄마, 브라가 너무 불편해.” “원래 다 그런 거야.” “언니는 괜찮아?” “난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은 이렇게 불편한 걸 잘도 티 내지 않고 다니는구나. 나는 왜 다른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것에 이렇게 신경을 쓰는 것일까.


예민한 사람으로 보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브래지어가 불편하다는 말을 하지 않게 되었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다닐 때까지 같은 사이즈의 속옷을 입었다. 불편함에 익숙해지는 것과 편해지는 것은 달라서, 집에 오면 현관문에서 신발을 벗는 것과 동시에 한 손으로 브래지어를 푸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내 가슴 사이즈가 A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다른 여자들이 모두 모두 나처럼 브래지어 하는 걸 힘들어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도. 재작년 즈음, 백화점에 갔다가 예쁜 브래지어를 봤다. “이거 A컵 주세요”라고 했더니 점원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고객님 그 사이즈 진짜 맞으세요? 아닐 것 같은데….” 속옷 전문 매장에는 줄자로 가슴을 재어 정확한 사이즈를 알려주는 무료 서비스가 있었다. 밑둘레를 재고 BP(Breast Point)라고 하는 가슴 중간 부분까지 재고 난 뒤 점원이 내 사이즈를 말해주었다. “75C인데요?”


내게 맞을 거라며 권해주는 사이즈의 브래지어를 입어 보았다. 새로운 브래지어는 가슴 전반을 살포시 덮어주었고, 브래지어 끈 밖으로 살이 삐져나오지도 않았다. 팔을 이리저리 움직여도 불편하지 않았으며 집에 가서 브라를 벗었을 때도 몸에 자국이 진하게 남지 않았다. 자신의 진짜 사이즈를 모르고 있는 여성들이 많다고 한 점원의 말이 생각났다.  


몰랐던 건 가슴 사이즈뿐이 아니었다. 내 발 사이즈가 240이 아니라는 것도 20대 후반에야 알았다. 신발은 원래 크게 신는 게 맞는 거라고 들었기 때문에 엄마가 사온 신발에 발을 맞춰왔다. 하지만 내게 맞는 사이즈는 운동화가 235, 구두는 230이었다. 심지어 외국 브랜드의 구두는 225가 맞기도 하다는 것과 내 왼발과 오른발의 사이즈가 미묘하게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브래지어를 하면 답답하고 구두를 신으면 발이 헐떡거렸지.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모두 아니었다. 그때쯤 많은 것이 깨어진 것 같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힘드니 나만 참으면 되는 게 아니었구나. 그래서 어딘가 맞지 않아 삐거덕거렸던 일들이 많았구나.

내 사이즈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자꾸만 변하듯, 마음도 자꾸 변하는 것이 당연했다. 연애를 하면서 남자친구나 나에게 큰 성격 차이나 심각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 아닌데 자연스럽게 마음이 떠나는 경우가 있었다. 동성 친구 간에도 다른 학교에 진학하고 다른 관심사를 가지게 되며 서서히 연락을 줄이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걸 남들도 다 겪는 권태기 같은 거라고 규정해버리기엔 마음의 복잡 미묘함이 설명되지 않았다. 그런 경우 억지로 관계를 연장시키려는 노력을 하다보면 더 외로워졌다. 나는 왜 이렇게 끈기가 없고 이기적일까 고민하기도 했다.


하지만 예전에 열렬히 좋았던 것이 시시해지기도 하고 취향이 변하듯 사람도 마찬가지일 수 밖에 없다. 인생의 주요 시기마다 목표와 우선순위가 바뀌었다. 그래서 같이 있고 싶은 사람도 계속 바뀐 것이다. 내가 사회학에 푹 빠져 있을 때에는 사회참여를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을 사랑했고, 영화와 음악에 관심을 많이 가졌을 때는 예술가의 면모를 보이는 사람에게 반했다. 농담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을 때는 개그 코드가 맞는 사람을 찾아다녔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고 싶어 고민하고 있을 때에는 배려심 많은 이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그럴 때에만 나는 제일 나다울 수 있었다.


우리는 관계하는 타인들에게 영향을 받고, 그의 일부가 나의 일부가 된 후 작별하며 성장한다. 나이를 먹고 얼굴이 변하고 몸이 변화하듯 시간이 지나면서 나를 둘러싼 환경들이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아무리 친밀했던 사이라도 그 만남이 더 이상 나를 성장시키거나 자극 시키지 못한다는 느낌이 들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고 떠나보내게 되었다. 부모님에게 경제적으로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독립하면서 어른이 되듯이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불화나 헤어짐은 어떨 수 없다고 인정하게 되었으니까.


지금의 내게 맞지 않는 걸, 예전에는 맞았던 사이즈라고 욱여넣고 있으면 필연적으로 자신을 미워하게 되고야 만다.


요즘 인터넷에 ‘자존감 높이는 법’ 같은 글이 많던데, 그에 대한 많은 지침이 있지만 그중 기본은 나의 변하는 몸과 마음의 사이즈를 체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변화를 직시한 후 그에 맞는 것을 찾아 나서야 새로운 만남이 시작될 수 있다. 언제든 떠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가장 현재에 충실할 수 있기도 하다.


나는 문태준의 시 <옮겨가는 초원>을 외울 정도로 참 좋아하는데, 이 시는 변화와 성장, 사람 사이의 적절한 거리에 대한 시라고 해석된다. 시의 일부를 여기에 옮겨 쓴다.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 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 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 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나

그대는 그대의 양 떼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고

나는 나의 야크를 위해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기자 (후략)


언젠가 또 나는 변한 사이즈를 재어보고, 새로운 풀밭을 찾아 천막을 옮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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