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들은요, 아프면 도태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주인 앞에서 통증을 숨기죠.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라는 방송에, 키우는 강아지가 마루바닥을 무서워해 걷지 않으니 고쳐달라고 하는 견주의 에피소드가 나왔다. 유심히 보던 훈련사 강형욱 씨가 걸음걸이를 지적하며 뒷다리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주인은 알고 있었다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5년 전부터 그랬어요. 원래 다리를 절면서 걷는 습관이 있는 것 같은데요.”
그러나 훈련사의 말대로 병원에 가서 정밀 진단을 받자 슬개골 탈구가 확인되었다. 수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 개는 통증 때문에 미끄러지기 쉬운 마루바닥을 무서워했지만 주인은 그걸 알 수 없었고, 다만 집에서 걷는 것을 싫어한다고 믿어왔던 것이다.
개는 착하다고 하는 주인의 칭찬을 언제나 기다린다. 사람의 입장에서 착한 개란 이런 것이다. 배변을 정해진 곳에 하고, 주는 것을 무엇이든 잘 받아 먹는 것. 누구라도 물지 않으며 주인이 없어도 집안을 어지르지 않고 얌전하게 기다리는 것. 이런 일들을 할 때 개는 착하다는 칭찬과 함께 간식을 얻어내곤 한다.
아이 때도 마찬가지. ‘착한 아이’는 부모의 말을 잘 듣는 데서 시작한다. 주는 대로 음식을 골고루 잘 먹고, 친구나 형제 자매와 싸우지 않고 양보를 잘 한다. 떼 쓰지 않고 울지 않을 때 아이는 순하고 착해서 부모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고 칭찬을 받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착하다’고 할 때는 말이나 행동으로써 배려했거나 그런 성향을 보이는 사람을 지칭할 경우다. 스스로를 착하다고 표현하는 사람은 없다. 또 ‘착함’은 특정한 권력구조 속에서만 활용되는 특징이 있다. ‘착한 사람’은 권력관계에서 나와 비등하거나 하위에 있는 사람에게 쓰인다. 나의 상사가 잘해줬다고 해서, 나이 많은 어른이 무언가를 베풀었다고 해서 우리는 그에게 ‘착한 분’이라고 하지 않는다. ‘착하다’는 말은 애초에 권력관계에 기반한 언어인 것이다.
누구나 어릴 때는 철저히 부모에게 의존한다. 착한 아이가 되어서 사랑과 인정을 받고 싶어한다. 문제는 이 아이 때의 심리가 어른이 된 후에도 그를 지배할 때다. 아이는 부모에게 기쁨을 준 만큼 실망을 안기며 자란다. 부모의 기대는 언제나 과도하고 자녀의 생각과는 어딘가 조금씩 빗나가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한 인간이 주체적인 존재로 성장하는 데는 이처럼 부모와 투쟁하면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과도한 억압을 받아 내면의 목소리를 듣는 데 실패하게 되면, 그는 어른이 되어서도 상대의 말을 잘 들어 착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
휴대폰이 있으면 와이파이가 잡히듯, 내게 있는 것들은 귀신처럼 잘 보인다. 주변의 ‘착한 사람’들을 나는 잘 알아본다. 그들은 주로 “괜찮아요” “전 상관없어요”라고 말한다. 부담스러울 정도로 내 의견을 경청하며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거의 대부분 “좋아요”라고 한다. “안 되는데요” “그건 좀 힘들어요” “싫은데요” 같은 말을 하지 않는 것도 공통점이다. 그런 말을 하느니 아예 연락을 끊어버리고 차라리 ‘잠수를 타는’ 유형이다.
한국의 많은 여자들이 그러하듯, 20대 초반의 나 또한 전형적인 ‘착한 여자’ 였다. 그 시기 가장 큰 고민이 낮은 자존감이었던 걸 생각하면 착한 아이 콤플렉스는 자존감의 문제와 함께 붙어 다닐 수 밖에 없는 듯하다. 착하지 않으면 사랑 받을 수 없다는 믿음이 남에게 ‘NO’를 말하기 힘들게 하고, 눈치를 살피다 보면 주눅이 들 수 밖에 없다. ‘알아서 해주세요’ 가 되어 버리는 반복.
그때의 내가 했던 많은 “괜찮아”들이 너무 무거워서 나는 헥헥거렸다. 나보다 상대를 배려하느라 정작 나를 배려하지 못했다. 특히 연애에서 그랬다. 그런데 아마 이 이야기를 그때의 남자친구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은 황당해할 것이다. “그걸 네가 싫어하는지 몰랐는데? 그럼 그때 말하지 그랬어?” 그렇다. 사실 그들은 강요한 적이 없었다.
착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포지셔닝하다보면, 가장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이 이 지점이다. 착한 여자였던 그때, 나를 둘러싼 관계들이 자꾸 일그러지는 것이 상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양보했는데 상대가 이기적이라고. 이처럼 ‘희생했다’고 하는 상황 판단은 이상한 보상심리를 가져온다. 겉으로 사소해 보이는 문제로 싸우게 되더라도 ‘착한 사람’의 내면에는 그동안 그가 참아온 것들이 차곡차곡 싸여 있어서 큰 문제로 번지는 경우가 많다. 자존감이 줄어드는 만큼 피해의식이 커지기 때문에 걸핏하면 “네가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를 외치게도 된다.
돌이켜보니 혼자 과도하게 기대하고 섭섭해한 경우가 많았다. 문제가 나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는 시간이 꽤 걸렸다. 내가 관계의 중심 키를 잡는 것이 부담스러워서 상대에게 떠맡겨 버리고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고 속상해했구나. 상대 또한 그게 부담스러웠을 텐데.
그런 문제를 직시하게 되면서 작은 것부터 조금씩 거절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못한다는 말도 할 수 있게 됐으며, 싫은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안 된다는 말을 하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떠나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인간 관계는 더욱 좋아졌다.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고 이용했던 사람들은 떠나갔고 동등하게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 받으려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인간 관계는 시소게임이나 스파링 같아서, 체급의 차이가 크게 나면 게임을 계속할 수 없다. 잠깐 한 두번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져줄 수 있겠지만 그건 배려하는 쪽도 받는 쪽도 금방 지쳐버리는 일이다. 인간관계를 지속하는 요건으로 ‘착함’을 드는 사람에게, 그건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건강할 수도 없다고, 예전 내 모습이었던 착한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어느 한쪽이 '착해야만' 유지되는 관계라면, 그 관계는 사실 없어도 상관없는 시시한 게 아닐까?
아사이 료의 소설 <누구>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인맥을 넓히겠다고 늘 말하지만, 알아? 제대로 살아 있는 것에 뛰고 있는 걸 ‘맥’이라고 하는 거야. 너 여러 극단의 뒤풀이 같은 데 가는 모양인데, 거기서 알게 된 사람들과 지금도 연락하고 있냐? 갑자기 전화해서 만나러 갈 수 있어?”
진짜 펄떡펄떡 뛰고 있는 인맥이라면, 나의 ‘NO’에 떠나가지 않는다.
착한 인간이 되려고 애쓸 필요 없다. 나는 강아지가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