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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Jan 19. 2017

망한 밤을 밝히는 별들의 말

난 위대해지고 싶어, 그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거고


뮤지컬 영화 <라라랜드>가 2016년 영화계를 휩쓸었다. 74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 노미네이트된 7개 부문을 석권한 것이다. 라이언 고슬링과 엠마 스톤이 출연하고 다미엔 차질레 감독이 쓰고 연출한 <라라랜드>는 한편의 서정시 같았다. 꿈을 찾는 두 청년이 성장해 나간다는 스토리는 평범했지만 그걸 뮤지컬 영화로 풀어낸 연출이 워낙 세밀하고 환상적이라 영화를 본 사람들을 디즈니랜드에 온 것처럼 붕붕 떠있게 했다.  


다미엔 차젤레 감독이 2013년 발표한 전작 <위플래쉬>도 여운을 많이 남겼던 영화여서 집에 돌아와 그가 한 인터뷰들을 검색했다. 좋아하면 더 알고 싶어진다. 여러 글을 읽다 보니 공통적으로 나오는 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다미엔 감독의 진짜 첫 작품은 <위플래쉬>가 아니라 <라라랜드>라는 것이다. 다미엔 감독은 2006년 이미 <라라랜드>의 각본을 완성했다. 그러나 당시 신인이던 그에게 선뜻 투자하는 사람은 없었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듯 안 될 이유는 넘쳤다. ‘제작비가 너무 많이 든다’ ’뮤지컬 로맨스 영화는 안 된다’ 등등. 다미엔 감독은 <라라랜드> 대신 <위플래쉬>를 만들어 능력을 입증해 보여야 했다. <위플래쉬> 속 주인공의 대사, “난 위대해지고 싶어. 그러려면 시간이 더 필요할 거고”는 당시 다미엔 감독의 상황과 겹쳐진다. 


<위플래쉬>는 평단의 좋은 평가를 받았을 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흥행해 제작비의 12배 넘는 수익을 올렸다. 그러자 다미엔 감독은 2006년에 완성한 그 <라라랜드> 시나리오를 다시 꺼내 제작자를 만날 때마다 설득했다고 한다. 물론 시나리오는 예전에 거절을 당했던 내용 그대로였다. 그러나 상황만큼은 완전히 바뀌었다. 안 되는 모든 이유들이 힘을 잃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영화 감독 중 한명인 최동훈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 그가 처음 쓴 시나리오 내용은 다섯 명의 청년이 은행을 터는 이야기였다. 시나리오를 완성해 영화사에 가져갔지만 거절당했다. 당시 심사를 보았던 사람 중 한 명은 그 시나리오가 통과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주인공이 다섯 명이나 되는 인물 구성이 어색하고, 대사에 비속어가 너무 많다.” 하지만 그가 쓰고 연출한 영화 <범죄의 재구성> <타짜> <도둑들> <암살>들의 공통점은 여러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고 무언가를 훔치며 비속어가 많다는 점이다. 


무려 박찬욱 감독도 흑역사가 있다. 그는 1992년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데뷔했다. 결과는 대폭망. 어느 정도 망했느냐 하면, 어떤 곳에서도 리뷰를 써주지 않았다. 이준익 감독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아나키스트>라는 영화를 박찬욱 감독에게 맡기려고 했는데 당시 제작자들이 모두 “감독이 박찬욱이면 투자할 수 없고 감독만 바꾸면 투자하겠다”고 반대해 다른 감독에게 기회가 넘어갔다고 한다. 그런 식으로 5년 동안 영화를 찍지 못하다가 드디어 기회를 얻어 <3인조>라는 영화를 찍었지만… 지난 번의 폭망이 무색하게 더욱 격렬히 망했다.


<살인의 추억> <괴물> 등으로 믿고 보는 감독 대열의 선봉에 있는 봉준호 또한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가 완전히 망해 마니아 취향의 상업적 비전 없는 감독으로 분류되었다. 비슷한 시기 류승완 감독은 여러 차례 영화제와 시나리오 공모전에 응모했다가 모두 떨어졌다. 당시 봉준호 감독은 류승완 감독에게 “난 재능이 없나봐… 우리 제빵사나 할까?”라고 자주 이야기했다고 한다. 그때 그들을 위로한 말은 비참하기로 당시 자웅을 겨루던 박찬욱 감독이 자주 했던 이야기였다.


"재능이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고,
스스로 있다고 생각하는 그 믿음이 중요한 거다."



남들이 하는 말을 듣고, 단점을 없애는 부분만 집중하다 보면 장점이 함께 없어진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좋아할 때, 밋밋한 사람보다는 단점이 있더라도 특정한 장점이 크게 발휘되는 사람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원래 반짝거렸던 것들을 여러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로 수정하다 보면 결국 그것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것이 되곤 한다. 


사람들은 대개 관찰은 적게 하고 판단을 빨리 한다. 무언가의 진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일정 시간 이상을 들여 관찰하는 것이 필요한데 그럴 애정과 시간이 없는 것이다.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를 예측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지자 기준과 시스템을 강화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쓴다. 대기업 서류 심사에서 토익이나 학점의 일정 점수 이하를 탈락시키는 것도, 창업 심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창업자의 학벌인 것도 비슷한 이유에서다. 



다미엔 감독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끝까지 좋아했다. 뮤지컬 영화가 안 된다고 하고 결말을 해피엔딩으로 수정하자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 말을 믿지 않은 덕에 <라라랜드>를 완성했다. 최동훈 감독은 ‘거친 이야기를 잘 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는 말을 들었지만 여러 명이 나와 시끌벅적하게 훔치는 모습을 꾸준히 그려내면서 그 분야의 독보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20대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시기다. 당신이 어떤 분야의 문을 두드리더라도 사람들은 자꾸만 지금은 믿을 수 없으니 무언가를 더 보이라고 보챌 것이다. 이때 남들이 하는 말을 그대로 다 믿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잘 모른다. 충고인 것 같지만 자기 자랑에 불과한 경우도 많다. 다들 답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그러니 박찬욱 감독의 말대로 난감한 재고 취급을 받더라도 나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라는 생각이 중요한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 만큼 나라도 나를 믿어야 나라는 개인에 대한 균형이 맞춰질 것이니까. 비관할 수밖에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찾는 방식은 이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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