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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문정 Apr 11. 2017

우리가 서로를 구하는 힘, 공감능력

세월호 3주기를 맞이하며


ILLUST 키미앤일이


한 달 전쯤 있었던 일이다. 택시를 탔는데 라디오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 관련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기사분이 말을 걸었다. 대통령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말에서 시작한 화제는 세월호까지 옮겨갔다. 세월호에 대해서 “아이들은 안됐지만 대통령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고 해서 듣고 있던 내가 그때부터 말을 섞었다. 반박하자 그가 이렇게 말했다. “이제 가슴에 묻어야 한다” “부모들은 어마어마한 보상을 받지 않았느냐. 그 정도면 로또 수준이다” 그 말을 듣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기사님 자식이 그렇게 되어도 똑같이 생각하실 것 같은가요?” “그럼! 힘들어도 참아야지요.” 나는 목적지보다 일찍 내려 걸었다.      


공감이란 상상력을 발휘해 다른 사람의 처지에 서보고, 다른 사람의 느낌과 관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 능력은 인간이 타고난 소중한 재능 중 하나다. 타인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은 많아야 2%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나머지 대부분은 천성적으로 공감능력이 있고 이를 통해 사회적 연대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체감하기로는 2%를 훨씬 넘는 것 같다. 나는 쿨한 것을 좋아하는 이 사회가 후천적 공감능력 결핍자들을 양산하고 있지 않은지 의심한다.      


나는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사적으로 만나지 않는다. 그들이 주변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 딱히 악의가 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된다. 다른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인격으로 상상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사 결정을 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어떤 비판이든 다시 상대 쪽으로 튕겨내 버리는데 능하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오래 관계하게 되면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정서적으로 불안해지며 자존감이 급격히 낮아진다.      


가장 큰 불행은 이들을 부모로서나, 직장 상사, 사회 지도층으로 만날 때 생긴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해관계가 있는 경우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위해 아무렇지 않게 남을 희생시킬 수 있다. 이들은 얼핏 냉철하며 원칙적이어서 이상적인 사람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그가 대하는 타인은 숫자나 수단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이를 상하 관계로 만나게 되면 정서적으로 학대를 당하면서도 개인이 이를 중단시키기가 어렵다.      


특히 우리는 사회의 지도층으로서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을 만난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있다. 많은 심리학자들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인생 경험이 폐쇄적이고 트라우마에 갇힐 수 밖에 없었던 환경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10살 때 청와대에 들어가 27살 때까지 18년을 살았다. 청와대가 그녀에게는 집인 셈이다. 22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27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일 때 예능 <힐링캠프>에 출연해 그 같은 인생의 고비를 이야기한 후 “슬픈 드라마를 봐도 저건 슬픔 축에도 끼지 않는데” 같은 생각을 했다고 말한 적있다. 사람이 극심한 충격에 빠지면 무의식적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방어기제를 작동함으로서 자신을 보호하게 된다. 세월호 참사가 있었던 당일에 미용사를 불러 올림머리를 하고, 기자회견에서 표정의 변화 없이 눈물을 흘리고, 기자들에게 “세월호 참사가 작년이었나요 재작년이었나요”하고 되묻는 행동은 그런 트라우마에서 비롯된 공감능력의 결여에서 나온 일이다. 이처럼 공감능력이 낮은 사람의 행동은 사회에서 적절히 제어되어야 한다. 인간의 개별적인 행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라면 공감능력이 낮은 사람을 사회지도층이 되도록 하지 않을 것이다.


일상의 관계에서도 표현의 자유와, 공감능력의 부재로 인한 폭력을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 연예인이 대중매체에서 어린 시절 왕따를 시켰다거나 무언가가 필요해 훔쳤다는 식의 행위를 인터뷰로나 노래 가사로 아무렇지 않게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한 때의 치기어린 영웅담처럼 묘사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아슬아슬하다. 세상에 마이크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볼륨을 자꾸 높이면 약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된다.      


인터넷의 글을 볼 때도 비슷한 경우를 본다. 삶과 인간관계의 폭이 적고 온라인에서의 커뮤니케이션에만 익숙해지면 인간군상을 자꾸 뭉뚱그려서 정의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학생은 ‘급식충’이고 엄마들은 ‘맘충’이며 노인들은 ‘틀딱충’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구분을 지어 조롱하는 것은 세상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세월호 유족들이 단식 투쟁을 하고 있을 때 커뮤니티 일베에서 광화문에서 피자와 치킨을 먹으며 ‘폭식투쟁’을 한 것은 인간성에 대해 궁극적으로 회의하게 한 사건이었다. 이런 이들을 보수와 진보의 문제로 이야기하거나 표현의 자유로 설명할 수 있는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세월호 3주기가 다가온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가 작년이었는지 재작년이었는지 헷갈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세월호가 침몰됐던 날을 잊을 수 없다. 뉴스를 듣고 걱정하던 날의 무거운 공기. 전원 구조됐다는 소식에 기뻐하던 것. 그리고 다시 설마 설마하면서 뉴스를 찾아보던 날들. 


세월호라는 공동의 기억을 통해 우리는 그 이전과 모두 조금씩 바뀌어 버렸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것 같지도 않고, 세상은 나쁜 일들 투성이지만 그래도 세상에 희망이 있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공감의 마음이 있어서인 것 같다. 그리고 이것이 인간이 타고난 것 중 위대한 이유는 ‘내가 해봐서 아는데’가 아니라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하는 고차원의 상상력 때문일 것이다. 그로 인해 실패하면서도 노력하는 마음, 개개인의 사연을 살피려 하는 시스템 같은 것들이 우리를 조금이나마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4월이 되었다. 세월호가 떠오르는 모습을 우리는 함께 보고 있다.


 

시민 정용순씨가 강원도 원주시 행구동에서 찍은 ‘세월호 리본 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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