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정문정 Nov 14. 2017

없는 게 아니야, 네가 모르는 거야

ILLUST 키미앤일이


‘이번엔 제발 괜찮은 기사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택시를 탈 때마다 긴장하며 하는 생각이다. 우리 아버지도 버스 운전을 20년 넘게 했기 때문에 운전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서 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 이해하려 하지만 탈 때마다 높은 확률로 불친절한 기사님을 만나게 되니 쿵쿵 뛰는 심장을 주체하기 어렵다. 편리하기 위해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인데 불편한 마음으로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


그런 기억들이 누적되던 차에 사람들과 택시를 탔던 경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자들은 대부분 공감하면서 자신들도 택시를 탔을 때 불편했던 경험이 많았다고 했다. 재밌는 건 남자들과 대화할 때였다. 대부분의 경우 남자들은 택시를 탔을 때 불쾌한 경험을 한 경우가 거의 없다며 신기해했다. “택시 타는데 불편할 일이 뭐가 있죠?”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요….) “보통 타자마자 목적지를 외치고 잠들지 않나?” (여자들은 혼자 택시를 탔을 때 잠들지 않는데요. 특히 밤에는 더더욱!)      


내 남동생은 어떤 정도의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사람이든 치유해주는 능력을 갖고 있다. 키 180cm에 몸무게가 100kg을 육박해, 어딜 가면 “비시즌 (선수)이세요?” 하는 질문을 받는 몸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경상도 출신이라 원래 말투가 퉁명스럽기까지 하다 보니 그냥 궁금해서 한 질문에도 간곡한 사과를 받곤 한다. 딱히 그럴 것까진 아니었는데 환불도 자주 받는다. 얼마 전에는 택시를 타고 가다가 모르는 길로 가기에 “저기, 왜 이쪽으로 가는데요?” 물었더니 택시비를 받지 않겠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이들은 기본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다 친절하다고 생각한다. 가끔 남동생과 이야기하다 보면 같은 나라에 같은 종으로 사는 게 맞는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남동생과 이야기할 때만큼이나 택시에 대한 서로의 경험치가 너무 달라 놀라웠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택시와 관련해 불쾌한 경험이 없는 사람 중에는 두 종류의 반응이 있었다. 한 타입은 “나는 그런 적이 별로 없지만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면서 그저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잘 모르지만, 잘 모르니까 이해해보려 노력하는 사람. 반면 다른 한 타입은 나로 하여금 입을 다물게 했는데 그들이 한 반응은 대체로 이런 것이었다. “에이, 그럴 리가. 네가 예민한 거 아니야?” “어쩌다 이상한 사람만 만난 거겠지.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나는 조용히 한 풍경을 떠올렸다. 난생처음 해외여행을 갔을 때 일이다. 대학 때 처음으로 영국에 가서 한 달 가까이 머물렀는데, 그때 본 풍경 중 신기한 것이 있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거나 길을 걸을 때, 카페에서 차를 마실 때도 자주 장애인들과 마주치게 되는 일이었다. 한국에서는 일상에서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본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했다. “영국에는 장애인이 엄청 많은가 보네? 한국에는 장애인이 별로 없는데.” 영국에 유독 장애인이 많은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장애인은 집 밖을 나오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걸 안 건 그로부터 시간이 많이 흐른 뒤였다.      


최근 한국의 가장 큰 사회적 이슈는 젠더 문제다. 1990년대에 태어난 여자들은 자라나며 그 윗세대와 달리 남녀가 평등하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자도 반장이 되는 것을 보며 컸다. 그런데 20대가 되어 교육받은 것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당황한다. 명절에는 엄마 혼자 부엌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성차별적인 모습을 일상에서 종종 만난다. 이들에게 성희롱이나 데이트폭력을 당한 여성을 주변에서 찾아보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이다.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은 그런 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들은 토로한다. 한국에서 여성으로 사는 것의 힘듦에 대해서.      


문제는 이처럼 여성으로서 느끼는 실질적인 공포나 두려움을 토로했을 때, “나는 잘 모르지만 그럴 수 있었겠다”고 공감하는 것이 아니라 “네가 예민한 거다” “너만 힘든 게 아니다. 다들 힘든 건 똑같다” “내 주변에는 그런 일이 없다”며 무시해버리는 일이다. 내가 겪지는 않았더라도 누군가에겐 지금 일어난 현실인데, 잘 모른다는 이유로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취급당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이런 대접을 받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볼륨을 키우기 위해 더 거칠고 센 방식으로 분노를 표출하게 된다.      


아이들은 자기가 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상상할 수 없기에 처음 본 그 상태를 고유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자기와 타자가 분리되지 않아 자기중심적으로만 세상을 보는 것이다. 어른인 사람은 처음부터 어른이라고 생각하기에 할머니가 엄마의 엄마라고 하면 놀란다. 어른의 시각으로 보면 ‘패드립’인 말도 많이 한다. “선생님도 엄마 아빠가 있어요?” 하고 놀라기도 하고, “선생님은 남편이랑 남자친구랑 같이 살아요?” 하고 해맑게 묻기도 한다. 술래잡기를 할 때도 자기가 보이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생각해 몸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눈만 가리고 멀뚱히 서있다.      


그러니 모르는 일을 없는 일처럼 대하는 건 얼마나 아이처럼 유치하고 좁은 행동인 것일까. 사람에 대한 상상력이 없으면 다른 사람을 쉽게 미워하게 되고, 윽박지르게 되고, 잘못부터 따지게 된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다양한 입장과 이해관계로 살아가고 있기에 느끼는 것이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꼭 경험을 해봐야만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입장으로 살아볼 수 없지만, 상대를 이해해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상상력을 동원하고 공감 능력을 발휘하면서 살아간다. 상상력이 곧 타인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책을 읽는 등의 예술 활동을 하는 것도 실은 그런 고차원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나는 여자로만 살아봐서 남자로 살아가는 일의 고충을 잘 모른다. 그래서 군대 이야기가 나오면 그냥 듣기만 한다. 다 듣고 나서 “그렇구나. 힘들었겠다”라고 한마디 할 뿐이다. 군대에 가보지 않은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정도 반응에도 남자들은 감동을 받는다는 것이다.


잘 모르니까,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 모르니까, 쉽게 비난하거나 무시하지 않는 것. 내가 모르는 너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 그런 역지사지를 꾸준히 해나가야 우리는 서로를 미워하지 않고 대화할 수 있다. 번거롭고 어렵지만 노력하고 싶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나에게 그렇게 대해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는 줬지만 나는 받지 않았어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