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중에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부터 하기
아빠는 마음이 여리다.
가끔 나나 동생을 야단치게 되는 날이면 잠도 잘 못 주무시고 내내 괴로워하시곤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일이다. 전학 간지 며칠 안되어 아직 담임선생님도 반 아이들도 낯설었을 땐데,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 번은 아침에 아빠에게 크게 혼이 났고 그 때문에 난생처음 지각이라는 것을 했다.
나는 이미 교문 앞의 선도부들마저 자리를 다 뜬 후에야 학교에 도착했고, 아침 자습시간을 감독하시던 담임선생님은 나를 복도에 세워두셨다. 창피하고 자존심이 상했다. 새 학교에 오자마자 지각이나 해서 문제아처럼 복도에 서 있는 꼴이라니..
혼자 울상을 하고 찌그러져 있은지 십 분쯤 되었을까..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하얀 피부에 말끔히 넘긴 머리, 멋진 양복차림을 한 40대 초반 ‘리즈시절'의 우리 아빠. 세상 가장 환한 미소를 띤 채 바쁜 걸음으로 내게 온 아빠는, 왈칵 눈물을 쏟은 나를 안고 토닥여주셨다.
때아닌 부녀상봉에 반 친구들이 웅성대며 복도 창가로 모여들기 시작했고, 아빠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복도로 나오신 담임선생님께 상황을 설명하시며 애 늦게 보내서 죄송하다고 멋쩍게 웃으셨다.
선생님은 이제 그만 들어오라며 나를 다시 교실로 부르셨고, 그날 하루, 지겨울 만큼 반복되던 반 친구들의 “너네 아빠 짱 멋있다” 소리에 나는 온종일 기분이 꽤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각한 딸내미 걱정되어, 굳이 출근길에 학교로 와준 아빠. 선생님을 만나고 내 손에 두둑이 용돈을 쥐어준 후 (이게 중요한 건 아님 ㅋㅋ) 이제 안심이라는 표정으로 다시 바쁘게 회사로 향하던 그때 아빠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지금은 보통 운동복이나 반바지 차림에 많이 야위고 피부도 상했지만, 그 시절 나와 동생에게 아빠는 세상 최고 멋진 훈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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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캐나다에서 맞은 첫겨울에 지인분께서 찍어주신 비디오테이프가 있다. 오래간만에 그때의 영상을 다시 보다.. 하얗고 뽀얀, 어리고 활기 넘치는 영상 속 아빠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보자마자 폭포수 같은 눈물을 쏟았다. 세월의 야속함에 마음이 아팠다.
내가 학교와 사회에 적응하며 어른이 되려고 발버둥 치는 동안 아빠의 젊음이 떠나간 것이 서글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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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젊음은 한 때인 것을 안다. 이제 40대의 문턱을 밟은 나도, 살다가 정신 차려보면 50대, 60대가 되어있겠지.
나는 그저 아빠의 노후가 오래도록 즐겁고 편안하기를 소원한다. 때로는 나이 들어감에 울적해질지언정,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소박하게 즐겁게 사시는 아빠가 그래서 참 고맙다.
60대 이후의 삶에 대한 컨텐츠들을 챙겨보며 행복한 노후, 건강한 노후, 즐거운 노후란 어떤 것일까에 대한 고민도 해보고, 부모님의 노후에 조금이나마 더 보탬이 되자는 생각으로 재테크 공부를 하기도 하지만..
일단,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기로 한다. 내 소중한 아빠에게 자주 리마인드를 해주자, 내가 아빠를 많이 사랑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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