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게 엄마가 나이 들었음을 알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피보호자에서 보호자로의 역할 변화가 천천히 스미듯 찾아온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나에겐 그게 그리 여유롭게 찾아와주지 않았다. 폭풍처럼 찾아와 내 어깨를 흔들었다. 이제는 보호자가 되어야 할 시간이라고. 채근하는 시간에 나는 어떤 대답도 못한 채 보호자가 되어 버렸다.
압축하자면 엄마가 사기를 당했다는 것이다. 엄마는 이 일로 돈도, 몸도, 마음도 다 잃었고 이제는 내가 없으면 살아가기 힘든 지경이 됐다.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역할 교체는 한쪽이 훌쩍 커버림으로써 일어나기도 하지만, 한쪽이 부쩍 여위어버림으로써 일어나기도 했다.
경제적 보호자가 되는 일은 무엇보다 나의 작은 5평 집을 엄마와 나누는 걸 의미했다. 나는 엄마가 사기를 당하고 있을 무렵 독립을 해보겠다며 5평짜리 임대주택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 엄마가 사기를 당했다. 자연스레 우리는 18평 집을 처분하고 5평 집으로 나앉게 됐다. 엄마 집에 빌붙어 살 생각만 했다면 우리 둘 다 노숙자가 될 수도 있었겠지. 이건 다행인 걸까. 어쨌든 선택의 여지 없이 우리 둘은 5평 집으로 오게 됐고 1년째 이 집에 살고 있다.
18평 집에서도 개인 공간이 부족하다며 카페로 나돌던 나인데, 5평 집에 엄마와 그야말로 찰싹 붙어 살게 되니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다. 출근길 지하철 스트레스는 저리 가라였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런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엄마에게 나의 무엇도 나눠주지 못한 채 살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내 공간을 지키려고 했다. 엄마가 이 좁은 공간에 발붙일 틈이 없음을 알면서도 내 옷을 둘 공간, 내가 좋아하는 의자가 서 있을 공간을 점유하고 내주지 않으려 버텼다.
그런데 집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엄마 옷을 보니 짠한 마음이 들었고, 내가 공부하고 있을 땐 식탁에 앉지 못해 쟁반을 받쳐 들고 밥을 먹는 엄마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지 말라고 입으로는 말하면서도 공간을 내주지 못하다가 서서히 옷장을 한 칸, 두 칸 비웠고 좋아하던 의자도 다른 집으로 보내버렸다. 물건은 줄었지만 공간은 늘었고, 엄마를 품을 수 있는 내 마음의 품도 그만큼 커졌다. 그제야 이 좁은 마음 탓에 엄마가 얼마나 불안했을지 어렴풋이 알게 됐다.
신체적 보호자가 되는 일은 병원에서 "보호자님"으로 불리는 것이었다. 크고 작은 병원에서, 응급실에서, 수술실 앞에서 나는 엄마의 보호자로 불려나갔다. 간호사들 입장에서야 60대 엄마와 온 30대의 나를 보호자로 부르는 게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겠지만, 불리는 내 입장은 그렇지 않았다. 운 좋게도 그동안은 그럴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늘 내 보호자일 줄 알았고, 나는 늘 엄마의 그늘 아래 살 줄 알았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이 일을 당하기 전의 엄마는 참 건강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밤낮으로 투잡을 했을 정도였으니. 취미는 인라인 스케이팅이었고 매일의 루틴은 뒷산 운동이었다. 술담배는 얼씬도 안 했고 면이나 빵 같은 것도 잘 안 먹었다. 당연히 달고 사는 약조차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너무 방심했다.
사실 엄마는 강한 척했을 뿐, 속으로는 차곡차곡 나이 들어 가고 있었다. 지금 눈에 띄게 쇠약해진 엄마를 보면 건강했던 엄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게 속상하다. 엄마는 참 나한테 짐이 안 되려고 노력하던 사람이었는데 그 노력을 내가 조금만 알아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보호자가 되어 이 병원 저 병원 데리고 다닐 게 아니라 건강했던 엄마를 지켜줬어야 하는 거였다.
엄마가 그랬다. "엄마가 우는 거 속상해하지 말어. 너라도 앞에 있어야 눈물이 나와서 그래. 눈물도 못 흘리면 나 못 살아. 그러니까 눈물 흘리는 건 괜찮아. 너도 그렇게 생각해줘." 엄마가 나라도 봐야 눈물이 난다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걸까. 나는 당장 엄마가 울음을 그치고 웃어주길 바랐지만 말없이 엄마를 쓰다듬어줬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다. 누구 봐 주는 사람도 없는데 울고 있는 건 이상한 일 아닌가. 누구라도 옆에서 봐주고 얘기라도 들어줘야 눈물이 나오지. 그러니 우리가 이 5평 집에 함께 있게 된 것은 참 다행한 일인 것이다.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각자의 방에 박혀서 얼굴도 안 보던 그때였다면 엄마는 보고 울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울 때 바라봐줄 사람도 없었을 것이고, 쓰다듬어 주는 사람도 없었을 테니. 내 입장에서도 엄마가 울 때 바라봐주지도 못하고 쓰다듬어주지도 못했다면 뼈에 사무치는 후회로 남았을 것이다.
심리적 보호자가 되는 건 별게 아니다. 그냥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것, 얘기를 들어주는 것, 거기에 가능하다면 손 잡고 등이라도 쓸어주는 것이다. 이게 뭐 대수라고 나는 여태 그걸 미뤄왔던 걸까. 참 야박한 딸이었다.
처음엔 무작정 닥쳐온 보호자의 역할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냐고 버티기도 했다.
그런데 알게 됐다. 사실은 내가 먼저 서둘러서 조금씩 보호자가 되었어야 했음을. 엄마가 무너지기 전에 내가 먼저 우뚝 서서 엄마의 기댈 자리가 되어 줬어야 하는 거였다. 게으른 나는 그걸 언제까지고 미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을 뿐이다.
엄마는 늘 겉으로는 강한 척, 혼자서도 다 할 수 있는 척했다. 사실은 약해지고 있었으면서. 분명히 엄마가 약해지고 있다는 사인을 보냈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상반된 사인 중 나한테 편한 쪽을 믿어 버렸다. 엄마는 아직 나 없이도 괜찮을 거라고, 그러니 아직은 내가 하고 싶은 게 먼저라고. 너무한 건 세상이 아니라 나였다.
서른둘, 인생 전체를 돌아봤을 때 보호자로 산 시간보다 피보호자로 산 시간이 더 길어서 아직은 많이 서툴다. 하지만 곧 익숙해질 것이다. 엄마는 내 나이에 나를 낳아 나를 오롯이 책임졌으니. 조금 늦었지만 엄마의 곁을 지켜야겠다. 씩씩하고 든든한 엄마의보호자가 되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