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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셜리 Oct 08. 2023

세리프체 같은 사람

'자기만의 뾰족함'을 진정으로 받아들이기

몇 년 전, 심우진 디자이너님의 인디자인 실습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수업 때 들은 건 다 잊었는데 희한하게도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당신이 읽는 동안>이라는 책 이름은 계속 읽고 싶은 책 목록에 남아 있었다. 구하기도 힘들고 읽을 책도 많아서 못 읽고 있다가, 최근 그 책을 구해서 읽고 있다.

  

타이포그래피 디자이너인 헤라르트 윙어르가 쓴 이 책은 글꼴 디자이너가 본 '사람이 읽을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의 문제를 다룬 책이다. 뇌과학이나 문학 학자들이 연구할 법한 주제를 디자이너가 다룬 이유를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은 과학이 변화와 개선의 출발점이 되기를 진실로 바란다. 그런 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하는 수 없이 스스로 실험해 볼 수밖에 없다." 누구도 덤비지 못하던 일에 어쩔 수 없지, 하며 무심하게 팔을 걷어부치고 나서는 사람이라니, 너무 매력적이지 않은가. 나는 이런 집착 좋아한다.

 

책에 자주 나오는 말 중 눈에 띈 게 있었다. '세리프'와 '산세리프'라는 말이었는데, 일하면서도 몇 번 들어본 말이라 궁금해서 찾아봤다. 알고 보니 '세리프'라는 말이 삐침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알파벳에 삐침이 있는 글꼴을 세리프체라고 부르고 삐침이 없는 글자를 부정의 의미가 있는 접두사 '산'을 붙여서 산세리프체라고 부른단다. 이런 말이었구나.


이 말을 듣자마자 든 생각은 '나는 세리프체 같은 사람이 되어야지' 하는 것이었다. 그 어떤 거스러미도 없이 매끄럽게 다듬어진 산세리프체 같은 사람 말고, 조금 울퉁불퉁하고 다루기엔 쉽지 않은 면이 있어도 그 가시 자체를 자기 개성으로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 여기서 포인트는 자기의 모난 부분을 자기 개성으로 받아들이고 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나는 그러지 못했다. 회사 생활을 십년 가까이 하면서도 둥글둥글한 사람으로 변할 것인지, 모난 모습을 유지할 것인지 선택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자를 택했다면 진작에 서글서글한 웃음과 물 흐르듯 나오는 쿠션어를 장착했어야 한다. 그 결과 원만한 회사 인간관계를 얻고 커리어에서도 더 큰 성과를 얻을 수 있었겠지. 후자를 택했다면 적어도 괴롭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난 모습으로 살기로 내가 선택한 것이니까, 여기저기 부딪히며 일하더라도 '나는 왜 이러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나는 둘 중 어느 것도 마음으로 선택하지 못했다. 경력이 쌓여 둥글어진 척하면서도 어떤 포인트에서는 결국 부딪히고야 말았다. 회사 생활하려면 체념하고 살아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진심으로 그걸 옳다고 여기진 못했다. 그러다 보니 속에선 부대낌이 생겼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엔 그걸 밖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때때로 격한 감정을 드러내는 나 같은 사람을 회사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것은 작용 반작용. 모난 사람이 들이받으면 회사에서도 그에 응하는 모난 반응을 보이기 마련이다. 그렇게 악순환을 만들어가고 있는 나는 말로는 머리의 뿔을 깎고 싶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뿔을 깎기 싫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성난 소 같았다. 이건 나에게도 회사에도 좋지 않았다.


왜 나는 뿔을 깎고 싶지 않았을까. 타고난 본성이어서 못 깎은 것이기도 하지만 그게 사실은 나의 강점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뿔은 체계적이고 계획적으로 일하는 면을 말한다. 나는 일의 전체 과정을 분류하고 중요도에 따라 배치해서 일정에 맞춰 해나가는 것을 좋아하고 잘한다. 그래서 회사에서 쓰임받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이것을 놓는다는 것은 내 밥줄을 놓겠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치만 나는 '모든 일은 체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그러지 않은 일은 결과물마저 엉망이 되고 일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혼선도 피할 수 없다.'는 절대 신념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세상엔 체계나 계획 없이도 일만 잘하는 회사원들이 많았다. 그들의 방식과 나의 방식이 부딪칠 때 나는 어떻게 했을까. 강하게 내 방식만 맞다고 주장했다. 아직도 그 믿음은 버릴 수가 없다. 결과물은 같아 보일지 몰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정돈된 과정으로 만들어진 것이 더 나으리라 고집스레 믿고 있는 것이다.

 

일한 지 10년 차, 지금까지 바꿀 수 없었던 신념이라면 그냥 안고 가기로 했다. 나는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일을 해나간다. 그게 남들 방식과 달라 충돌하게 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 문제를 확대해서 '내가 성격이 더러운가 봐' '나는 왜 이렇게 고분고분하지 못할까' 하지 않기로 한다. 그 과정에서 나와 상대방의 감정이 상하지 않는 것이 포인트인데, 그게 내가 연습해야 할 부분이다. 그들의 방식이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 자체를 모자란 사람이나 틀린 사람으로 규정하지 않는 마음이 중요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내가 얻는 것은 나의 모난 부분, 즉 계획적으로 일하는 장점을 살리고 키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둥글둥글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맞나 봐', '그냥 저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해줘 버리자, 일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어차피 내 것도 아니잖아' 해버리면 그때부턴 모든 일이 진짜 내 일이 아니게 된다. 생각 없이 일하는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건 내가 일하면서 가장 경계하는 부분이다. 그렇게 되면 나는 장점도 단점도 없는 애매한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곤 머지않아 도태될 것이고.

 

누구나 삐침, 모난 구석, 뾰족한 장점은 있다. 그게 거슬리고 불편하다고 해서 없애버리면 그건 일에도, 자기 자신에게도 결코 좋지 않다고 생각한다. 후각이 예민한 사람이 조향사가 되고, 안목이 빼어난 사람이 디자이너가 되는 법이다. 지금 당장 거슬리는 자신만의 예민함이 있다면 그저 '나는 세리프체 같은 사람이구나' 하고 받아들여보는 게 어떨까. 괜히 깎지도 못할 뿔을 만지작거리느라 부대끼는 시간은 최대한 줄이는 것이 인생에 이득이다. 지금 이 순간부터 나는 세리프체 같은 사람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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