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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 Nov 18. 2019

울음 주파수

 



        


 점심을 먹고 들어가는데 저 멀리서 누가 나를 보고 꾸벅 인사를 한다. 누군가 봤더니 마케팅 부서의 호대리였다. 우리는 사적으로 말 한마디 섞어본 적 없는 사이다. 그런데도 내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2015년 사내 체육대회에서 피구를 할 때, 그가 나를 맞출 수 있었음에도 맞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청년 같은 이미지라 호대리라 그를 칭하기로 한다. 호청년인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먼저 잘 다가오는 사람을 보면 부럽다. 나는 겁쟁이에 의심도 많고, 결정적으로 사람을 잘 믿지 않는다. 믿지 않기 때문에 기대도 없고, 실망도 없는 편이다. 항상 시작보다 끝을 먼저 떠올리는 사람으로 다가올 마지막을 대비해 둔다. 안부 인사도 받기만 했었다. 이제는 많이 좋아져(내 기준으론) 가끔 먼저 안부를 묻기도 한다. 마음을 잘 여는 일은 아직도 숙제 같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닌데 인사를 받아주지 않아 상대에게 상처를 준 적도 있다. 먼저 인사를 잘 건네지 않는 성격이다 보니 누가 나에게 인사를 건네면 어색하다. 그렇게 우물쭈물하다 보면 인사할 타이밍을 자주 놓쳐버린다. 호대리에게도 먼저 인사를 해야지 다짐하지만, 매번 인사를 받기만 한다.

      

 어렸을 적엔 하도 울어서 어른들이 울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엄마의 증언에 따르면 누가 나를 만지려고만 해도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한다. 부자 사촌 집에 초대를 받아 갔는데 신발도 못 벗고 도로 나와 집으로 왔다고 하니 얼마나 대단한 울음인지. 아직도 외갓집에 가면 어른들은 이름 대신 울보 왔냐고 부른다. 또 다른 별명은 땡비였는데 경상도 사투리로 아주 아주 무섭고 큰 벌을 이르는 말이다. 울보와 땡비는 동일인물로 사람들이 곁에 오지 못 하게 하는 필살기로 울음을 택했다. 얼마나 시끄럽게 운 걸까? 목청이 좋은 편인데 이유가 여기 있었나 보다. 커서 든 생각은 단순히 겁이 많아서 모르는 사람들이 무서워서 그렇게 울었겠구나 싶었다.     


 호대리가 나를 맞추지 않은 것은 겁을 먹었기 때문이다. 운동 신경이 별로 없는 편이라 학창 시절에도 피구 시간이 싫었다. 먼저 죽어 늘 친구들에게 핀잔받기 일쑤였고, 그렇다고 상대편을 잘 맞추지도 못했으니 팀에서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달까. 그날도 일찍 죽겠구나 생각하고 마음을 비우고 있었는데 호대리 덕분에 거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그 일로 호대리는 같은 팀의 핀잔을 들어야 했지만.      


 겁보는 길을 걷다가 땅에 떨어진 검정 비닐봉지에도 놀란다. 그냥 멈춰 서 있는 사람을 보고도 혼자 놀라서 무안했던 적도 있다. 그런 마음의 사람인 게 부끄러웠다. 잘 놀라고 잘 다치는 마음이어서 나눌 게 없는 빈손이라 볼품없어서. 자꾸만 손을 뒤로 감추다 보니 정말로 손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중요한 순간에 내밀 손이 없어진 거다.


 -잠시만요, 내 손을 어디에다 뒀더라.      


 애매하게 아는 얼굴이 보이면 동공은 지진이 난다. 인사를 해야 하는데 타이밍을 언제로 하면 좋을까 하고 눈알이 바쁘다 못해 아프다. 그냥 돌아서 갈까? 생각하는 내가 있다. 저기 멀리서 모자를 쓴 이사님이 보인다. 왜 오늘 하필 10분이나 일찍 나와서, 라는 자책의 말로 나를 탓한다.     


 생각해 보니 무서워하는 게 참 많다. 걱정도 많다. 초등학교 때까지 머리맡에 식칼과 성경책을 두고 잤었다. 너무 아이러니한 행동이다. 식칼은 괴한을 물리치기 위한 용도이고, 성경책은 귀신을 물리치기 위한 용도다. 잘 알겠지만, 성경엔 살인하지 말라고 나와 있다. 개도 무서워하고, 물도 무서워한다. 이쯤 되면 나 빼고 다 무서워한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끔은 내가 무섭기도 하다. 사는 건? 말해서 무엇할까. 온갖 공포 속에서도 여전히 나는 나를 잘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쟤는 대체 언제 서울로 가느냐는 문경 어른들의 타박 속에서도 울기를 그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리 많은 시간이 지나도 인사 잘하는 인간은 되지 못할 것을 안다. 먼저 잘 다가가지도 못할 것이다. 어쩌면 마음을 쉽게 잘 여는 인간도 되지 못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나 때문에 많이 외로워질 수도 있고, 그게 내가 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이제는 너무 잘 안다. 조금씩 나아지는 중이겠지만, 조금이 크게 바뀌지 않을 것도 안다. 실망하지 않는다.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서워서 울었던 아이는 커서 잘 울지 않게 되었다. 초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임자가 울지 말라고 했다. 사람들 앞에서 울면 얕잡아 보니 눈물을 보이지 말라고. 그때부터 진짜로 사람들 앞에서 잘 울지 않으려고 했다. 울어야 하는 순간에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내가 울지 않아서 나 아닌 사람이 대신 울었다. 사람의 마음이 그토록 차가워질 수도 있구나. 울고 싶었던 날이 있었고, 울고 싶어 집어 든 책이었는데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이 얘기를 악아한테 했더니 원래 내재된 슬픔이 더 큰 거라고 다독여 줬다.      


 지금은 다시 울 수 있는 사람으로 돌아왔다. 나만을 위해 울던 울음이 더 단단한 울음이 되어 이제는 함께 운다. 돌이켜 보면 울음이 지켜줬다.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을 지켜주는 울음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울음의 소리를 듣고 싶다. 우리 앞에 펼쳐진 모든 것들이 당신에게만 무서운 게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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