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경 Feb 17. 2021

자화상

2009




 아침, 신경질적으로 전화가 울려대기 시작했다. 아내의 잔소리보다 더 요란스럽게 울려대는 전화기 소리. 달콤함에 입맛을 다시며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켜 전화를 받았다.

 “오화백님이신가요?”

 “예, 제가 오화백입니다만 누구십니까?”

 “부탁드리고 싶은 일이 있어 전화드렸습니다.”

 “무슨 일이신지?”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저희 선생님의 자화상을 대신 그려주시면 되는 일입니다.”

 수화기 너머로 남자는 담담히 말했다. 자화상이란 말에 잠이 확 달아나는 것을 느끼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 화 상 이요?” 

 “네에. 자화상 말입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첫째, 저희 선생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시간은 2시간입니다. 둘째, 그림은 24시간 안에 완성해 주셔야만 합니다. 셋째,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을 시 보수는 지급되지 않습니다. 아, 차비 정도는 챙겨 드리죠. 넷째, 그림이 마음에 들었을 경우, 부르시는 대로 값을 지급하겠습니다. 자, 어떠십니까? 오화백님께 꽤 나쁘지 않은 조건인 듯싶은데 저희 선생님의 자화상을 그려주시겠습니까?” 

 “생각을 해보겠습니다.”

 나른한 졸음이 밀려왔다. 눈이 막 감기려던 찰나였다. 

 “순수는 배고픔을 미덕이라 생각한다죠?”라고 서늘한 어조가 귓가를 찔렀다.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이만.”

 “하하, 그럼 생각해 보시고 오늘 안으로 연락 주십시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누웠다. 남자의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둥둥 떠다녔다. 갈증이나 거실로 나오니 아들놈이 어지럽혀 놓은 거실은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머릿속에서 부르시는 대로 값을 지급하겠습니다, 가 메아리쳤다.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제 잠들기 전, 아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도 돈을 받고 그림을 그려주면 어때요?라고 조심스럽게 말하던 아내의 얼굴이 아들놈 얼굴에 겹쳐졌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퍼즐을 맞추면서 놀고 있는 아들놈을 바라보고 있자니 마음이 착잡해졌다. 전화기로 자꾸만 시선이 갔다. 목마름보다 먼저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침을 꼴깍 삼킨 뒤 시계를 쳐다봤다. 전화를 끊은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의뢰인의 집은 담이 높고 길었다. 촌빨 날리게 입을 헤- 벌리고 있는 꼴이라니. 그러나 어쩌겠는가? 안 다물어지는 걸. 남자는 자신을 집사라고 소개했다. 생각했던 거완 다르게 침착하고, 푸근한 인상이었다. 게다가 젊었다. 아무리 많이 봐도 20대 후반으로 보였다. 요즘 같은 세상에 집사라니, 집사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의 얼굴엔 생기가 없어 보였다. 

 “내리시죠.”

 차에서 내려 집을 바라본 순간 이건 집 수준이 아니라 저택이었다. 다소 음울해 보이는 저택은 마치 이목구비가 없는 사람 같이 보였다. 저택을 보고 넋이 나가 있는 동안 집사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제가 처음 말씀드렸던 조건은 기억하고 계시죠?”

 “네, 모.”

 집사는 잰걸음으로 복도를 누볐다. 양쪽으로 많은 문들이 있었다. 각각의 문이 호기심을 자극했고, 집사를 따돌리고 저 문들을 하나하나 열어보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걸음을 늦췄다. 내 걸음이 느려질 때마다 집사는 뒤를 흘깃흘깃 돌아보았다. 얼마나 많은 문들을 지나쳐 온 걸까? 드디어 집사가 어떤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들어가시죠.”
  문을 열어주며 집사가 말했다. 

 방 안에 나를 밀어 넣고 집사는 살짝 미소 지으며 방문을 닫고 나갔다. 방 안을 둘러보니 방이라고 하기엔 천장이 높고, 과하게 넓었다. 창문도 없고, 의자도 없고, 가구도 없었다. 그야말로 텅 빈 홀 같았다. 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어두워졌다. 칠흑 같은 암흑. 설마 이런 어둠 속에서 2시간 동안 갇혀 있어야만 하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했다. 또한 아니길 간절히 기도했다. 

 “오화백님 제 의뢰에 기꺼이 승낙해주신 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방이 넓어 어디쯤 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당신은 누구시오?”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멍청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당신은 어디 있죠?”

 “저는 여기 있습니다.”

 “2시간 동안 당신을 볼 수 있게 해 준다고 당신 집사가”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선생이 치고 나왔다.

 “당신은 지금 나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어둠 속에서.”

 “이래선 자화상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렇군요. 당신의 작품세계는 보이는 것에만 집중한 사실주의니까.”

 선생은 내 말을 잘라먹으며 제 이야기만 늘어놓았다. 얼마 전 집사와의 통화가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집사의 그 기분 나쁜 말투가 주인을 닮아있었다. 

 “자, 시간은 아주 많습니다. 아시다시피 말입니다. 마음껏 즐기십시오. 조급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저는 어둠 속에 있지만, 오화백님 얼굴이 또렷이 보입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누렇게 뜬 얼굴이 말입니다. 하하하.” 

 쩌렁쩌렁 울리는 웃음소리가 그칠 때쯤 다리에 힘이 풀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말이 옳다. 나는 사실주의 묘사를 하는 사실주의 작가다. 그런 나에게 이런 의뢰를 하다니, 이건 분명 함정이다. 작가 인생에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기기 위한 누군가의 장난임이 틀림없다. 여기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다면 문을 박차고 나가면 그만이지 않은가? 나가기 위해 다시 일어났다. 그러나 앞이 보이질 않았다.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번 일만 잘 성사되면 엄청난 액수를 불러 조그만 화방을 가지고 싶었는데 욕심이 과했던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 꼴을 당할 리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바닥에 드러누웠다.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렸다. 초침 소리만이 여기가 존재하는 공간임을 깨닫게 했다. 얼마나 흘렀을까? 다시 문이 열리고 빛과 함께 집사의 얼굴이 보였다. 아무래도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집사는 내게 캔버스와 목탄, 유화 등 그림 그리는데 필요한 물품들을 건네고 방을 나갔다. 집사가 나간 문을 바라보며 설마 불이 꺼진 채로 그리라는 건 아니겠지,라고 생각하는데 거짓말처럼 또 불이 꺼졌다. 캔버스 앞에서 지금처럼 혼란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아내와 아들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집을 나올 때, 어깨를 털어주던 아내의 손길, 아들의 볼 뽀뽀.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려야 해, 무조건 그려야 해. 어서 스케치를 해!라고. 목탄을 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예술가에게 없는 것은 ‘진정성’이란 칼럼 기사가 오른손을 낚아챘다. 너는 지금 거짓말을 하는 거야. 남을 속이는 거라고! 주린 배를 움켜쥐고 뻥을 치는 모습을 봐. 이제 네 영혼은 바닥을 치겠지. 으으, 괴로움에 알 수 없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그림을 그리는 내내 이상한 소리를 냈다. 내 울부짖음이 잦아들 때쯤 문이 열렸다.     

 “수고하셨습니다.”

 집사는 이렇게 말하고는 그림을 가지고 나갔다.       

    

 그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저택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었다.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가려 했으나 자세히 말해 달라고 요구했다. 반쯤 풀린 눈을 비비며 두서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아내는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대체 뭘 그리고 나온 거야?”

 “자화상.”

 내 대답에 아내의 손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하라는 신호였다. 

 “나 자신”

 “당신을 그리고 나왔다고?”

 “그 어둠 속에서 기억나는 건 나밖에 없었어, 나밖에.”

전화벨이 울렸다. 전화기를 바라보는 아내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카미노 데 산티아고 가는 길을 아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