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앤가은 Oct 24. 2021

63빌딩에 슬리퍼 신고 출근하기

황금빛 건물 안 스타트업 일지




63빌딩

출근기



스타트업에서 일한 지 1년쯤 되었을 때, 우리 회사는 63빌딩 16층으로 이사를 갔다. 20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있던 작은 선릉 사무실이 63빌딩으로 이사를 간다는 건, 회사의 시리즈 B 투자유치가 성공적이었다는 뜻이었다. 매일 야근하며 나의 혼을 불어넣던 회사가 커가는 건 생각보다 더 뿌듯한 일이었지만, 이내 난감한 상황이 펼쳐졌다.


당시, 나는 암사역 끝 쪽에 있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운 좋게도 월 30만 원만 내고 셰어하우스를 하던 상태였다. 장담컨대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 방 한 칸을 독채로 쓰면서, 넓은 거실과 부엌을 맘대로 누비는데 월세 단돈 30만에 살 수 있는 집을 만난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 분명했다. 


게다가, 한강뷰 아파트? 이건 5년간 개미처럼 열심히 일한 지금도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이었다. 가끔 에어비앤비를 한다면 모를까..



초년생 신분으로 회사의 성장도, 좋은 집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나는 멍청한 짓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건 바로 암사역에서 여의도 63빌딩까지 매일 출퇴근하는 것을 결심한 것이었다. 서울로 출퇴근하기 위해 춘천에서도 오가는데 그게 뭐가 멍청한 짓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새벽 2시에 퇴근하던 스타트업 1년 차 마케터였고, 아침잠이 너무 많은 인간 유형이었다는 걸 간과했다는 것이 포인트다. 


그때부터는 지옥의 출근길이 시작되었는데, 새벽에 야근 택시를 타고 귀가하면 회사 법카로 긁는 돈이 2만 원. 잠깐 눈을 붙였다 떴을 뿐인데 다시 아침. 대중교통 타기엔 늦은 것 같으니 지각을 면하려면 또다시 택시. 그러면 출근길에 나가는 내 돈이 2만 원. 게다가 아침에 암사동에서 여의도로 가는 그 길은 막혀도 너무 막히는 거지. 이게 무슨 창조 낭비인가 싶기도 하고. 돈 없던 나는 지하철을 타기 위해 눈 뜨자마자 10분 만에 씻고 달리고 새벽에 들어와 눈만 붙이는 생활을 반복하다 결국 코피가 터지고 나서야 집을 옮겼다. 


다행히 여의도에도 좋은 아파트에서 셰어하우스를 하며 편안히 지낼 수 있었다. 생각해보면 어차피 한강뷰 볼 시간도 없이 일만 하는데 진작에 옮길 것을 무슨 허튼짓을 하고 있었던 거지 싶었다. 주거환경이 안정되자 나는 그제야 63빌딩에 입성한 스타트업의 나날을 소중히 관찰 할 수 있었다.


지금은 롯데월드타워가 국내 가장 높은 건물이지만, 지방 토박이 소녀로 자란 나에겐 63빌딩이 마음속 가장 높은 건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직장인이 되고서야 만난 63빌딩은 생각보다 더 번쩍이는 금빛이었고, 전망대나 아쿠아리움뿐만 아니라 한화그룹의 금융사들이 대거 입주해있는 대형 회사 건물이라는 것도 알게 됐다. 국내 랜드마크, 대기업의 대표 건물, 게다가 금융사 그룹. 이 3가지가 합쳐진 건물에는 하루에 몇백 명의 금융사 직원들과 관광객들의 유동인구가 아주 많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의도역에 이사한 곳에서도 종종 카풀서비스 (풀러스)를 이용했다. 역과는 많이 떨어져 있는 애매한 위치에 63빌딩으로 출근하는 길은 조금 복잡했는데, 그 회사로 출근하는 분의 차를 택시보다 저렴한 비용을 내고 이용할 수 있는 서비스였다. 누군가의 차로 63빌딩으로 이동하면, 차가 잠시 정차할 수 있는 후문 쪽에서 내리곤 했다. 문제는 그곳이 회장님이나 귀빈들을 내려주는 곳이었다는 것. 처음 후문으로 도착해서 카풀해주신 차주분께 인사를 하고 내리려는데, 차 문이 열렸다. 발렛을 도와주는 직원분이 귀빈으로 착각해서 차 문도 열어주고, 회전문을 대기시키고, 인사를 하는 아주 민망한 상황이 벌어졌다. 


하지만 자주 카풀을 이용하면서 발렛 직원분들은 나의 얼굴을 인지하셨고.. 새파랗게 어린 일개 1년 차 직장인인 것도 알아차린 듯싶었다. 이제는 나도 정차하는 쪽으로 들어가지 말고 밖에서 내리곤 했다. 서로 민망한 상황을 피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슬리퍼를 신은

스타트업 우리들



그렇게 회사 안으로 들어가면 16층으로 가는 엘레베이터를 타야 했다. 몇백 명의 유동인구를 태우고 오르락 내리락하는 엘베는 오전엔 자주 만원이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나는 우리 회사와 대기업의 차이점을 금세 발견할 수 있었다. 또각거리는 구두. 단정한 블라우스나 셔츠. 점잖은 향수 냄새가 나는 사람들과는 달리, 우리 회사 직원들은 복장부터 너무나 튀었다. 


유연하고, 수평적인 문화를 갖고 있던 젊은 멤버들이 모인 스타트업에는 당연히 복장 규제랄 것이 없었다. 주말출근도 불사하고 일을 하던 시기가 있었기에, 개발자들은 회사에서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고. 편한 후드, 맨투맨, 청바지, 츄리닝, 충혈된 시뻘건 눈, 부스스한 머리, 편안한 슬리퍼로 일하는 모습이 어색하지 않은 문화였다. 대외적으로 기자님들이나 다른 담당자를 만나는 나는 조금 더 단정하게 입고 다니긴 했지만, 정장 차림이나 구두를 신고 오는 일은 없었다. 


이런 사람들이 금융사 직원들과 한 엘베를 타면 관광객이 직원 게이트를 잘못 들어온 것 같은 느낌도 받았다. 건물 외벽도 금빛 번쩍이는 색에, 건물 바닥도 미끄러질듯한 대리석, 사람들도 모두 정갈하고 포스가 있는데, 우리만 63빌딩에 견학 온 낭낭한 대학생 같은 느낌이었다고 해야 하나. 출근할 때는 어찌저찌 지나가지만, 우리는 출근하면 자리에 있는 삼선 슬리퍼를 주로 신곤 했는데. 누군가 1층에 물건을 전해주러 내려올 상황이거나, 잠깐 간식을 사러 편의점에 내려올 때면 그 삼선 슬리퍼가 너무나도 튀었다. 게이트 출입을 관리하는 분들이 가끔 그 발을 쳐다보는 것도 같았다. 


차갑고 반짝이는 대리석 바닥에 또각거리는 구두와는 달리 터벅터벅 소리를 내며 걷는 회사 팀원들의 모습이 웃기고 귀엽게 느껴졌지만, 지금 돌아보면 조금은.. 신경 쓰고 다닐 걸 그랬다 싶다. 옮겨 간 광고회사에서는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스타트업 직원분들의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는 대표님의 철학 하에 모두 신발 다운 형태의 신을 늘 신고 다녔다. 처음엔 왜 이 편한걸 못 신게 하지?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런 모습 하나하나가 모여서 회사를, 문화를 만드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게다가 클라이언트 잡을 하는 회사라면 더더욱 신뢰감을 주는 모습을 하는 것이 옳다.


슬리퍼 말고도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더 있다. 요즘은 영어 이름을 쓰는 회사가 대부분이지만, 2017년도에는 스타트업들에서 주로 영어 이름을 썼다. 우리끼리 편하게 수평적인 문화를 만들기 위한 것이니 영어 이름을 꽤나 재밌게 짓곤 했는데. 우선 나는 앤이었고. 다른 분들의 이름은...프라이버시를 위해 생략하겠다. 비슷한 느낌의 이름으로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프로디테나 철학자의 이름인 소크라테스 같은 이름들이 있었다고 생각해주면 되겠다. 


회사에서 영어 이름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것은 수평적인 문화를 만드는 데는 좋았지만, 외부에서 그 사람의 본명이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영어 이름을 부르는 게 조금 민망한 일이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럴 때는 아 그 과장님이, 대리님이 라고 말을 하면서 넘기곤 했지만. 나는 쌩신입에 직급체계도 잘 모를 때였다. 게다가 나에겐 이 회사가 처음이자 전부였으니, 밖에서 영어 닉네임을 부르는 게 그렇게 창피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그날도 여전히 단정하고 어른 같은 금융사 직원들과, 대학교 동아리 같은 차림의 우리 회사 사람들과 같이 엘베를 탔던 날이었다. 점심 메뉴를 고르고 있었는데 나도 모르게 옆에 팀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프로디테! 우리 점심 뭐먹죠?"

"..."


그는 대답이 없었다. 나는 그가 현재 창피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 초자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재차 물었다.


"아프로디테! 아프로디테!"

"..."


그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이 빨개지고 있었다. 주위에서 들리던 수다 소리가 멈췄고, 약간 웃참 챌린지를 하는 것 같은 얼굴들이 보였다.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말려들어간 그런 입. 엘베가 로비층에 도착을 하고 나서야, 그는 나에게 짜증을 냈다.


"아 앤! 밖에서 닉네임 부르지 마요. 저 창피하다고요"

"아 죄송해요.. 깜빡했어요"


화가 난 멤버는 휙 뒤를 돌아 식당가로 먼저 향했다. 하지만 이내 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똑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영어 닉네임은 창피해하면서, 식당가로 향하는 수많은 사람들 중 유일하게 삼선슬리퍼를 신은 것에는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것이 너무 웃기고 귀여웠다. 젊은 20대 친구들이 모인 스타트업이 체계적이고 전통이 오래된 번지르르한 63빌딩 건물에서 일한다는 건 이런 모습이구나 싶은 날들이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신선하게 재밌던 날들이었다.


새벽까지 일 하던 날도, 

열띤 토론으로 밤새 울고 웃던 날도, 

슬리퍼를 신고 63빌딩을 누비던 날도,

재밌었고, 힘들었고, 슬펐고, 웃겼다.



나의 초년 시절의 일부분을

63빌딩에서 그렇게 지냈다는 것은

두고두고 확실한 축복이었다.




이전 11화 담배연기로 배운 사회연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