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차와 일하는 0년차 이야기
6년 전 조직생활을 할 때 있던 일이다. 지하세계가 아니고 그냥 회사를 잘 다녔다는 얘기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IT스타트업 마케팅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대학을 졸업할 당시, 나는 지금보다 심하게 깨발랄했고, 아주 솔직했으며, 매우 자신만만했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객기를 저지른 것이, 8년 차 PR 담당자를 뽑는 자리에 0년 차인 내가 지원을 해버린 것이었다.
당시 회사의 사정은 이러했다. 이제 막 투자도 받았으니 우리도 마케팅을 공격적으로 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다면 전문가를 모셔와야지! 하고 올린 '8년 차 PR 담당자' 자리에 갓 대학을 졸업한 목소리만 우렁찬 생뚱맞은 애가 등장을 한 것이다. 황당한 일이다. 면접을 볼 때도 너무 목소리가 커서 밖에서 듣던 동료는 나랑 대표랑 싸우는 줄 알았다고 했다. 깡이 좋았다고 포장하기엔 지금 와서 돌아보니 조금 창피하다. 요즘 SNL인턴기자를 볼 때마다 수치심이 드는 이유가 나의 이런 과거가 있기 때문이겠지.
경력은 없지만 나름 일머리는 있어 보였는지 나의 첫 회사는 나를 마케팅팀 매니저로 직무를 바꿔 채용을 해주었다. 초기 마케팅실을 세팅하는 단계였고, 나와 함께 일 할 사수는 20년 차 마케팅 전문가였다. 스타트업이었기 때문에 개발자의 집중노동을 위한 노란색 부스같은 방이 있었는데, 개발자는 많아지고 현재 마케터는 딱 두명이니 그 작은 부스를 마케팅실로 꾸리라며 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노란 방 마케팅실에 딱 두 명, 20년 차와 0년 차가 앉아 일을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 업력 짱짱한 전문가를 옆에 두고 아장아장 메일 쓰는 법부터 배웠다.
메일의 첫머리는 '안녕하세요. 이가은입니다.' 메일의 끝머리는 '감사합니다. 이가은 드림'
스타트업의 하루하루는 전쟁터였다. 각자가 자신의 분야를 리딩 할 실력이 되어야만 돌아가는 구조였다. 기지의 생존능력이 발휘된 건지 나는 그곳에서 혹독하게 일을 배우며 빠르게 업무에 속도를 낼 수 있었다. 일의 종류는 아주 다양했는데, 기획기사를 쓰고, 퍼포먼스 광고를 운영하고, 방송에 나갈 회사 소개 자료를 작성하고, 캠페인을 만들고, 오프라인 행사도 진행해야 했다. 나노 단위로 시간을 끊어가며 밥 먹을 때도 일을 하니 일이 안 늘 수는 없었다.
사실 일이 느는 것 쯤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성장의 과정은 재밌고, 러닝커브가 미친듯이 올라가는 이 상황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대학 때 공모전에서나 해봤던 일을 실무에서 해보니 생생한 피드백과 몰랐던 시행착오들은 나의 워커DNA를 더더욱 폭발시키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수는 앤 같은 애 한명 더 데리고 오면 좋겠어 라는 말을 대표에게 했다고 들었다. 20년차 사수에게 인정 받게 일을 했다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퇴근했던 나의 초년날을 기억한다.
하지만, 제법 '나 일 좀 한다' 우쭐 댔을 때
나에게 아주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발생했다.
마케팅실은 방 구조가 특이해서, 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쪽에는 나와 새로 온 에디터의 자리가, 오른편엔 사수가 앉아 등을 지고 일을 하는 모양새였다. 사수 쪽에는 큰 창이 하나 나있었는데 가끔 1층에서 담배를 태우는 사람들의 연기가 올라오곤 했다. 그날도 어김없이 토 나오는 업무에 모니터를 째려보며 일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내 코를 치는 담배연기에 나도 모르게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 담배냄새!" 하고 저절로 큰 소리로 말이 튀어나왔다. 등 뒤에서 사수는 이렇게 물었다.
"앤은 담배 냄새 싫어하나 봐?" 이 말을 듣자마자 나는 또 이렇게 답했다.
"아휴! 당연하죠. 담배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전 진짜 맡으면 머리가 아파요 (절레절레)"
사수는 "나는 좋은데."라고 짧게 답했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퇴근할 때쯤 깨달을 수 있었다. 모두가 퇴근한 밤 11시. 마지막 업무를 처리한 후 불을 끄려고 뒤를 돌아보는 순간, 내 뒤편에 있던 사수의 책상에 시선이 멈췄다. 책상 위에는 담뱃갑이 가지런히 올려져 있었다. 진짜 등골이 오싹했다. '담배를 태우셨었구나..?' 가까이 다가가 담뱃갑을 다시 바라보니 더 소름이 돋았다. 낮에 무심코 질색팔색을 하며 담배연기를 싫다고 말한 내게 보란 듯 담밍아웃을 해주고 간 것이었다. 그날도 이 솔직한 입이 문제였다.
여전히 비흡연자이지만 나는 그 뒤로 큰소리로 담배 연기가 싫다고 말하는 일은 없었다. 일은 늘었지만 연기는 아직 부족하네 라고 그 담뱃갑이 말하는 것 같았다. '앤은 너무 솔직해'라는 피드백을 많이 듣던 시기이기도 했다. 일을 하는데 연기가 왜 늘어야 하는지 완전히 납득하진 못한 채로, 그렇게 나는 연기실력도 일취월장했다. 원래의 나보다 목소리 톤은 낮게, 크기는 조금 작게, 낭낭한 솔직함보다는 정중하고 넉살 좋은 사람으로. 나름 비즈니스 매너라는 이름 하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꽤나 만족스러워하기도 했다.
옮겨 간 회사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동료나 선배들은 당연히 있었다. 담배를 태우는 시간이 따분한 분들은 너스레를 잘 떠는 나를 불러 낼 때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담배연기를 마시며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는 연기를 했다. 가끔은 내가 정말 아무렇지 않아 진 건지 헷갈릴 때도 있었다. 상대방이 뿜어내는 연기와 혼연일체가 되어 대화할 때면 그게 연기인지 나인지 구분이 가지 않기도 했다.
조직을 나와 지낸 지 반년이 넘어가면서 나는 연기와 멀어지는 연습을 한다. 원치 않는 프로젝트는 정중히 거절하고, 불필요한 미팅 자리엔 나가지 않는다. 전과 같은 클라이언트일지라도 일 외에 다른 에너지를 쓰는 것은 현저히 줄인다. 함께 일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사는 데는, 넉살 좋은 연기보다는 솔직한 피드백과 좋은 퀄리티의 결과만 있으면 된다는 이 당연한 사실을 다시 나에게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다음 주에 있을 강의자료를 만드는 데 창 밖에 담배연기가 올라온다. 그러면 나는 다시 "아! 담배냄새!" 하고 재빠르게 창을 닫는다. 그리고 문득 과거의 나를 떠올린다. '음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아도 됐었는데 말이야'
흡연자를 미워하는 글이 아니다.
그저 담배 연기를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했던 나에게도,
담배 연기를 뿜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도.
되도록 연기가 더 느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지금보다는 더 건강하자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