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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Jun 20. 2022

집이 아니라 동네를 떠나기로 했다.

내가 자취를 결심한 이유



회사가 멀다고 징징 거리며 집에서 독립만세운동을 벌이다가 문득 회사와 집이 멀어서 집을 나가야겠다는 생각만 자취하고 싶은 마음을 들게 한 건 아니었다는 걸 깨달았다. 29년째 강서구에 살며, 직장이 어디든 나는 잘 다녔다. 지하철, 버스, 택시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어쨌든 어디든 갈 수 있는 서울에 집이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렇게 잘 지내고 있었다. 그러다 이제 출퇴근에 대한 스트레스가 아니라 내가 퇴근해서 돌아오는 곳이 나에게 상처가 너무 많은 동네라는 걸 깨달았다. 


문득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 '여기서 내가 마주치기 싫은 사람을 만나면 어쩌지...?'와 같은 걱정들을 매주 해야 했다. '그냥 무시하지 뭐'라는 생각을 해도 됐지만 생각보다 나는 '무시'라는 걸 잘 못하는 사람이었고 마주쳤을 때 겉으로는 냉정히 지나치겠지만 그 이후에 심적으로 더 심해질 거라는 걸 알아서 독립을 결심했다.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한 말이 마음에 꽂혔다. 29년 강서구에 살면서 나는 여기에서 많은 상처를 받았다는 걸. 그래서 이 동네만 돌아다니면 상처받은 것들이 문득문득 가시처럼 나를 찌르고 있다는 걸. 코로나로 인해 '호캉스'라는 단어가 급부상하며 호텔에서 바캉스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나 역시 휴가만 생기면 혼자서 지낼 수 있는 호텔에 작은 방이라도 예약해서 1박 2일을 즐기곤 했다. 그때 느꼈던 감정을 A4용지에 쓰라고 하면 족히 3장은 넘길 수 있을 정도로 행복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는 내가 그저 '쉬고 싶어 하는구나~'에서 생각이 멈췄다면 요즘엔 퇴근하고 '삼성중앙역'에서 '가양역'까지 가는 길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강서구에서 상암을 갔다가 일산까지 출퇴근을 했던 적도 있는데 그때보다 지금 더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건 이제 이 동네를 떠나야겠다는 빨간 경고등이 켜진 거라고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래도 서울에 집 있는 게 어디야. 남들은 서울에서 자취하면서 고생하는데 너는 운 좋은 거지.'라고 매번 얘기하는 엄마가 어느 날 "너 왜 정신과 약을 먹어?" 라며 물었을 때 나는 밥을 먹으면서 웃음기 없는 건조한 목소리로 해야만 하는 말을 내뱉었다. 




"불면증, 그리고 공황장애, 또 우울증. 엄마, 내가 출퇴근 때문도 있지만 29년 한 동네에 살면서 나는 여기서 너무 많은 상처를 받은 거 같아. 인간들과의 관계도, 지나다닐 때마다 보이는 내가 일했던 곳들에서 받은 상처도 모두 이곳에 있어. 나는 이제 그것들을 느끼는 게 너무 괴롭고 힘들어."

"무슨 인간관계...?"

"영원할 거 같았던 친구도 잃었고, 물론 다 잃은 건 아냐. 새로운 친구도 많이 사귀고 속 마음 얘기할 친구도 있어. 오해하지 마. 그리고 연애하고 헤어지고, 가족과의 트러블도 그렇고 나도 모르게 괜찮다고 믿었던 것들이 상처로 남겨져 있었나 봐. 그래서 나... 이 동네를 떠나려고 해. 물론 출퇴근도 정말 오래 걸리고."




자취해서 돈 어떻게 모으려고!!! 소리 지를 줄 알았던 엄마가 의외로 담담하게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엄마는 네가 뭘 하든 막고 싶지 않아. 근데 안전한 곳으로 갔으면 좋겠어."라고 얘기했고, 우리는 더 이상 이 주제를 얘기하지 않았다. 나는 허락을 받았다고 생각했고, 엄마는 '얘가 이렇게 얘기하지만 금방 나가겠어... 한 몇 달은 있다 나가겠지.'라고 생각하는 거 같았다. 


하지만 뼛속까지 J인 나는 허락 같은 허락 아닌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집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7월 드디어 혼자 살기로 결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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