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신입에서 취준생 백수로
취업 준비 기간 없이 23살 일을 시작한 나는 취준이란 걸 겪어본 적이 없었다. 22살 1년 동안 정해진 쉬는 날 빼고 9시간 근무 신청, 대타까지 뛰며 모은 돈으로 MBC 작가교육원을 등록했고, 14살 때부터 키워온 꿈을 9년 만에 이룰 수 있었다. 23살부터는 어떻게 살았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카카오톡 단체 톡방이 활발해진 후에 1000명이 들어가 있는 작가 단톡방에서 연예인들 매니저들의 연락처를 물어보고, 구글&네이버에 온갖 장소 이름, 연예인 이름을 검색하며 자료를 조사하고 촬영 전날이면 밤을 새워서라도 촬영을 준비했다.
몇 년을 그렇게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일했을까? 더 이상 의미 없는 재미가 아닌 스토리가 쓰고 싶어졌다. 예능 작가로 10년 버티면 드라마 작가가 될 수 있겠지. 막연하게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10년은 쉬운 발음과 달리 긴 시간이었다. 깊은 고민 끝에 드라마 작가를 하겠다고 예능작가를 관뒀다. 작가를 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을 등록했고, 남아도는 시간에 오로지 글만 쓸 있는 환경이 아니었던 나는 다시 일을 구했다.
언제 보조작가로 일 할지 모르니 정규직은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것보다 방송작가의 경력으로 정규직, 대기업 이런 단어들은 턱없이 높은 문턱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게 계약직과 프리랜서였다. 다행히 과거 서비스직 알바 경험으로 인해 대학병원 외래 보조 계약직에 쉽게 들어갈 수 있었고, 계약이 거의 끝날 쯤엔 출근하는 프리랜서로 회사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땐 방송국의 세계에만 있던 나는 신세계를 만난 것처럼 신기했다. 정해진 시간에 출근, 정해진 시간에 퇴근하는 생활이 이렇게 삶의 질을 높여주는지 처음 알게 되었다. 지쳤던 몸과 마음은 정해진 출퇴근 시간 만으로도 어느 정도 회복이 가능해졌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고 갑자기 연락 온 보조작가 제안에 나는 후회하기보다는 보조작가를 해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또 쉴 틈 없이 일했고 어떻게 흘러들어 갔는지 모르게 정규직 직장인이 되었다. 가까운 몇 년 동안 나는 안정적인 직장인이 될 거라고 믿었다. 하루아침에 회사가 망하고, 권고사직을 당해 백수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22년 설날 전, 명절 선물 세트 대신 나는 회사에 높았던 짐을 들고 집에 돌아와야 했다. 9년 동안 쉴 틈 없이 일만 하면서 '백수'를 꿈꿨지만 막상 백수가 되니 뭐부터 해야 할지 어려웠다. 열심히 하던 SNS도 쓰고 싶었던 글도 모두 멈췄다.
처음엔 화가 났고, 그다음엔 우울함이 찾아왔고, 마지막엔 공허함이 찾아왔다. 다른 사람들의 시간은 제대로 흘러가는데 나의 시간만 거꾸로 가는 것만 같았다. 취업 준비 없이 작가로 경력을 쌓고, 인정받을 수도, 못 받을 수도 있는 방송 작가 경력으로 중고 신입이 되었고, 신입 백수가 되었다. 백수가 된 지 2달 차, 나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