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살고,나는 '착한 딸 사직서'를 품고 살았다
"너 요즘 엄마한테 틱틱거리고 해달라는 거 잘 쳐내더라." 거실에서 가만히 TV를 보던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예전 같았으면 "아니야~ 내가 언제~"라며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보이지 않지만, 언제나 품고 살았던 '착한 딸 사직서'를 엄마에게 시원하게 던진 나는 이제 "어 맞아. 나 요즘 나쁜 딸이야. 그러니까 신경 건들지 마."라고 대답한다. 이렇게 대답하기까지 꼬박 27년이 걸렸고 엄마는 아직 나의 사직서를 거부하고 있다.
'착한 딸'의 시작은 내가 어른들의 말을 알아듣기 시작했을 무렵으로 기억한다. "너는 어쩜 애를 이렇게 착하게 키웠니~" 어렸을 적, 엄마를 따라 어른들을 만나면 늘 저 소리를 듣는 엄마를 봤다. 철없고 생각 없고 그저 엄마밖에 몰랐던 난 어른들의 말이 나를 향한 칭찬인 줄 알았다.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사전적 의미를 찾아 본 후엔 더 착하다는 말을 들으려고 집착했다. 더 열심히 착한 딸이 되려고 노력했다.
착한 딸로 살면서 좋았던 적도 있었다. 하루는 친오빠와 친척 오빠, 나 이렇게 셋이 놀다가 이모네 집에 불을 낸 적이 있었다. 당시 농장을 하던 이모네는 농장 근처에 매트리스를 버려놓았었고, 우리는 불이 붙은 나뭇가지를 들고 다니다가 매트리스에 불씨를 떨어트렸다. 셋이 같이 놀았지만 어른들은 "착한 애가 왜 그랬어~ 오빠들이 나빴던 거지?"라며 넘어갔다. 착한 아이는 뭘 해도 "쟤가 그럴 리 없어."로 넘어갈 수 있는 방어막이 되어줬다. 하지만 내가 착한 딸 사직서를 내민 것엔 이득보다 불이익이 더 많아서였다. OK만 외치던 애가 갑자기 NO를 외치면 바로 변하는 차가운 시선이 따가웠다. "쟤 왜 저래? 쟤 성격 이상해졌어."라는 말로 어른들은 어린아이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그래도 꾹 참았다. 그러나, 27년 쌓은 착한 딸 공든 탑이 무너지는 건 짧은 한순간이었다. 10번이 넘도록 문 앞까지 갔다가 뒤돌아섰던 정신과에 처음 들어서서 두꺼운 설문지에 모두 답변을 한 뒤 결과를 보러 들어간 진료실 안에서의 20분. 그 20분은 나에게 '당장 착한 딸을 관둬!'라고 외치는 시간이었다. 경도의 우울 증상, 중증의 공황장애, 경중의 수면문제, 중증의 자살 위험. 그리고 이 모든 건 부모와의 문제라는 의사 선생님의 말에 나는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모조리 쏟아냈다. "휴지 써도 되나요?"라는 나의 질문에 "쓰라고 놔둔 거예요."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휴지의 반을 썼다. 수치로 확인한 나의 정신 상태는 빨간불 상태였다.
결과를 보고 돌아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나 정신과 가도 돼?"라고. 그때 엄마의 말에 엄마는 "웬만하면 안 갔으면 좋겠어."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순간 엄마의 이기심을 보았다. 아픈 딸은 착한 딸이 아니었다. 내가 착한 딸로 살아온 건 내 의지가 아니라, 엄마를 위해서였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나를 혼낼 때면 "엄마는 우울증이 있으니까 너는 엄마한테 착하게 굴어야지! 엄마 힘들 게 하면 안 되는 거잖아!"라며 우울을 무기로 나를 사정없이 공격하면서 나는 엄마에게 우울을 방패로 삼을 수는 없었다. 매일 가위에 눌려 일을 관둔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넌 좀만 힘들면 그러더라."라고 말하는 엄마의 시선에는 이제 '착한 딸'을 바라보던 시선은 사라져 있었다. 그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고, 나는 혹시 엄마에게 들킬까 조마조마하게 품고 있던 사직서를 마치 10kg이 넘는 아령 꺼내듯 무겁게 꺼내며 말했다.
오늘부터 엄마의 착한 딸을 관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