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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Jun 13. 2023

나란 애가 좀 잘 됐으면 좋겠는데 좀 후진애가 되었다

브런치 글쓰기를 눌러놓고 손톱 옆 살을 '틱 - 틱 -' 소리 내며 뜯고 한참을 화면만 쳐다봤다. 문득 정신 차리고 보니 화면은 보호기로 인해 검은 화면으로 바뀌었고, 화면에 비친 내 모습이 좀 후져 보인다. 


5평짜리 원룸에 어울리지 않는 퀸사이즈 침대에 누워 사람들의 인스타를 보다가 여행, 쇼핑, 심지어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올라 안정적으로 일하는 것까지 부러운 시선으로 보다 갑자기 밀려드는 짜증에 핸드폰을 무심히 던지고 누워 천장을 본다. 갑자기 대자로 뻗어있는 내 모습이 아까보다 좀 더 후져 보인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누구보다 열심히 그러면서도 누구보다 먹구름 가득하게 이런저런 남들은 겪지 못할 일도 겪어가며 살았는데 여전히 출발선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거 같은 내 모습이 너무 후져 보인다. 


원래 살던 집만 벗어나면 마음에 꽃밭이, 햇살 가득 천국이 펼쳐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상처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0년 전, 처음 겪는 20살, 성인의 성장통은 꽤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수업에 가는 게 도살장에 끌려가는 것처럼 무섭게만 느껴져서 냅다 버스터미널로 가서 일산으로 향했다. 일산엔 내가 고3 때 미친 듯이 열심히 다녔던 논술학원이 있었다. 논술학원 선생님은 평일 오전에 갑자기 찾아온 나를 보며 반가워하면서도, 놀라 하셨다. 


"그래, 대학가서는 어떻게 지내?"

"선생님, 사실 저 힘들어서 왔어요. 좀 힘든 거 같아요."

"다들 그렇더라. 다른 애들도 찾아와서 그렇게 얘기하더라. 괜찮아. 그래도 넌 19살 때 내가 그렇게 혼냈는데 그 자리에서 울면서도 내가 시킨 건 끝내 다 해내고 가던 애였잖아. 지나고 보니까 너 같이 독한 애가 없더라. 너 같이 하는 애들이 없어."


19살의 나는 내려놓는 걸, 포기하는 걸 모르는 좀 덜 후진애였나 보다. 




모바일 콘텐츠가 막 활발해지기 시작할 때, 그 당시엔 친했던 언니에 추천으로 방송국 모바일 콘텐츠 팀에 들어갔다. 처음으로 대본이란 것도 직접 쓰고, 어느 정도 인기도 있었기에 행복했던 시간들이 계속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같은 팀이었던 피디님들이 하나, 둘 나가고 프로그램도 결국 끝이 났다. 이후 팀에 혼자 남아 메인 PD가 시키는 잡일만 하면서 나를 여기에 추천해 준 언니가 소속된 팀과 섞이지 못하는 느낌을 받으며 자리에 앉아만 있을 때, 다른 친한 언니를 만나 점심을 먹었다. 


"언니, 저는 왜 이럴까요. 제가 약한 탓일까요? 인간관계가 너무 힘들어요."

"내가 봤을 때, 너는 착한 거지 약한 게 아니야. 내가 보기엔 너는 진짜 강한 사람처럼 보여."


그때의 나는 착한 사람에겐 보상이 올 거라고 굳게 믿었다. 



권선징악을 믿었는데 '착하다'라는 말을 말을 알아들을 때부터 쭉 - 들어왔는데 나는 매년 힘든 시기를 지났다. 열심히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남들 여행 다닐 때, 남들 대학에서 술 마시며 놀 때, 하루 10시간씩 아르바이트하면서 다니고 싶은 학원에 낼 등록금 벌어가면서 꿈을 쫓았는데, 매년 친했던 사람들에겐 텅장을 더 텅텅하게 비어가며 마음을 전하는 선물도 전했는데, 나는 여전히 인간관계가 힘들고, 여전히 나는 눈물이 많고, 여전히 나는 어딘가 고장 난 사람 같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 모두 벌 받았으면 좋겠어. 잘 되지 않았으면 좋겠어."라고 나쁜 생각과 마음을 먹어보기도 하지만, 결국 벌 받고, 잘 되지 않는 건 왜 또 나인지, 내가 후져서인지, 이 세상에 권선징악은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냥 처음부터, 태어날 때부터 나로 정해놓은 <트루먼쇼> 같은 건지.  


나는 이제 포기를 너무 잘하는 프로포기러가 되었고, 친했다고 믿었던 사람들과는 어느 순간 거리가 생겨버렸고, 어쩌면 나는 정말 타고난 재능도, 노력해서 스스로 만든 능력도 없는 후진 사람이지 않을까. 

나도 잘 나가는 사람, 좋은 집에서 태어난 누군가, 인기가 많은 누군가가 되기를 바라는 게 아니라, 내 존재 자체가 좀 잘됐으면 좋겠는 마음 하나뿐인데. 


30살의 나는, 드라마 <또 오해영>의 오해영처럼, <청담동살아요>의 오지은처럼, <눈이부시게>의 혜자처럼 여전히 애틋하고, 좀 후지지만 잘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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