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은 좀 잤어요?”
요즘 들어 제일 듣기 싫은 소리가 저 소리가 됐다. 잠을 자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충분히 일을 했음에도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우면 어딘가 모르게 불안감이 불쑥불쑥 심장을 툭툭 건드린다. 괜히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핸드폰을 켜고, 숙소앱을 켠다. 에어비앤비로 한 두 번 숙소를 잡아보니 이제 습관처럼 '숙소' 하면 에어비앤비를 제일 먼저 찾아본다.
도착지에 '강릉'을 친다. 셀 수도 없이 나의 마음을 유혹하는 숙소들이 줄줄이 나오기 시작한다. 괜히 예약도 못하면서 들어가서 숙소를 구경한다. 해질 때, 해가 뜰 때, 날이 좋을 때, 흐릴 때를 찍어 놓은 숙소 이미지는 그냥 보기만 해도 힐링이 된다.
그렇게 숙소를 구경하다 새벽 1시, 2시가 되고 나는 그제야 하품을 쩍쩍, 눈물을 흘리며 잠에 든다. 그리고 아침 7시 힘겹게 눈을 뜨고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상태를 평일 내내 지속하고 정신과에 가면 "잠 좀 자세요. 지금보다 한 시간이라도 더, 지금 가장 필요한 건 잠인 거 같아요."라는 얘기를 매번 듣는 것 또한 반복적인 일 중에 하나로 포함되어 가고 있다.
요즘 생각보다 놀라운 건 내가 똑같은 시간에 일어나, 똑같은 시간에 지옥철을 타고, 똑같은 시간에 퇴근을 하는 삶을 사는 걸 꽤 오랜기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프리랜서가 되었던 이유는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일어나 지옥철을 타고 출근을 하고 같은 일을 반복하고, 똑같은 시간에 다시 지옥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면 내 시간이 하나도 없다는 것에 현타를 느껴서였는데 지금은 자발적으로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 모닝 일기를 쓰고, 플래너를 작성하고, 자기 전에 다시 한번 일기를 적는 루틴까지 습관화되어 있다는 것에 스스로도 매우 놀라워서 하루하루 나는 '미라클'을 일으키고 있다 여기저기 자랑하곤 한다.
다만 지금 이렇게 사는 게 기적이지만, 그럼에도 정말 내가 기적이라고 생각했던 때는 따로 있다. 바로 과거 일 년 동안 지옥 같은 회사를 꾹 참고 다녀서 받은 제2의 월급인 퇴직금을 받고 새벽에 계획도 없이 무작정 기차표를 끊었던 날이다. MBTI 검사를 하면 J가 90% 이상이 나올 정도로 계획형인 나에게 무계획으로 기차표를 끊는 일은 매우 큰 결심이고, 행동력이었다.
어떤 마음이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땐 잠시 정신이 가출을 했던 것처럼 그냥 손가락이 움직였던 것 같다. 통장에 처음 찍혀보는 큰 액수에 '이 돈은 써야 해! 나의 고통을 보상받아야 해!'와 같은 생각만 가득했던 건지 덜컥 오전 7시에 출발하는 KTX를 예약하고 나는 그날 5시에 일어나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KTX에 타보는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생각보다 빨라서 잠도 못 자고 내려서 바로 갈 밥집을 찾았다. 온갖 커뮤니티, 블로그, 지도를 뒤져서 카레를 파는 곳을 찾았다. 그땐 혼자 여행이 처음이라 어떻게 계획을 세워야 하는지, 어디를 혼자 갈 수 있고 없는지 등을 찾아볼 겨를도 없었다. 그저 난 카레를 좋아했고, 나의 모든 교통수단은 택시가 될 것이었기에 그냥 맛있어 보여서 갔다. 그리고 매우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다시 택시를 타고 바다로 향했다. 근데 하필 날씨요정도 무심하시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혼자 청승 떨며 바닷가를 걷다가 편의점에 들어가 우산을 샀다. 너무 추워서 패딩을 잠그려고 하는데 하필 옷이랑 자크를 같이 잠가서 나중엔 패딩 자크가 안 풀리는 상황도 생겼었다. (다행히 오랜 사투 끝에 잘 풀었다.) 심지어 분위기 한 번 잡아보겠다고 노트북도 챙겨갔었기에 미친 듯이 내리는 비를 피해 카페에서 노트북 하는 여유로움도 즐길 수 있었다.
앞으로 살면서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아 노트북을 할 일이 생각보다 이렇게 없을 줄 알았다면, 이렇게 힘들 줄 알았다면 그때 좀 더 즐겨놓을 걸 이제 와서 조금이나마 후회를 해본다. 그렇게 해가 저물어 갈 때쯤 카페에 나와 언제 그랬냐는 듯 화창해진 바다를 찍어 간직했다.
그리고 바로 옆에 위치한 횟집으로 들어가 물회와 맥주 한 병을 시켰다. 와 내가 혼자 강릉에 와서, 혼자 물회집에 오고, 혼자 술을 시켜서 마시다니. 진짜 그 순간만큼은 내가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나는 너무 혼자서 잘하고 있었다.
사실 물회도 제대로 먹어 본 적도 없으면서 "'강릉' 바닷가 근처에 오면 그래도 물회는 먹어야지!"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얘기가 생각나서 먹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냥 그날의 분위기 탓이었는지, 나의 행복한 감정 때문이었는지 물회는 만족스러웠다.
긴 글의 끝에서야 무계획 혼자 여행이 좋은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려고 한다.
우선 누군가의 취향에 나를 맞출 필요가 없었다.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내가 가고 싶은 곳을 갈 수 있다는 것. 이러한 자유가 생각보다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걸 그날의 혼자 여행으로 깨달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평소에 너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살아가고, 맞춰가고 있음에 피로를 느끼고 있다는 걸. 그래서 가끔은 혼자서 고독을 즐기며 나만의 취향을 찾아 나설 필요가 있다는 걸 여행을 통해 느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감정이 상할 일이 없었다. 비가 왔을 때 나는 좋았다. 평소라면 비 오는 날이 너무 싫었을 텐데, 비가 쏟아지는 한적한 강릉 바다는 매우 낭만적이었다. 만약 내가 누군가와 함께였다면 어쩌면 그 함께하는 이는 "아, 짜증 나. 여행 날 왜 비 내리고 난리야. 아 진짜..." 라며 짜증을 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날 단 한순간도 짜증이 나지 않았다. 그저 행복했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힘이 들 때면 "나는 과거에 퇴사하고 갑자기 기차표를 끊어서 강릉으로 여행을 갔던 적이 있는데, 그게 너무 행복했어. 진짜 혼자 여행도 좋더라." 라며 아직까지 여행에 대한 주제가 나오면 주절주절 떠들 수 있다는 기억이 되었다는 점이다. 사실 여행을 많이 다녀보지 않은 사람이라, 여행이란 주제가 나오면 말문이 툭 막히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무계획 혼자 여행'을 해봤고, 가끔 이런 여행이 나에게 어떤 즐거움과 행복을 선사하는지에 대해 말하곤 한다.
위와 같은 이유로 가끔 무계획 혼자 여행을 생각하곤 하는데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다시 넣어두고 있다. 벌써 한 달째 가족도 만나러 가지 못하고 있기에, 시간이 나면 가족을 만나러 가거나, 혹은 애정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으로 시간을 보내기에도 부족하기 때문이다.
내가 문득문득 그날을 더 자주 떠올리고, 생각하는 건 어쩌면 저 날이 무계획으로 혼자 여행하는 게 처음이라 서툴러서 더 재밌게 즐기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는 지금도 그렇게 하면 되지, 쉽게 툭 내뱉지만
그때와 난 이미 너무 많이 달라졌으며, 벌써 여행을 생각하면 계획부터 짜는 사람이 되어버린 내가 다시 한번 정신을 놓고 무계획으로 혼자 여행을 시도하기엔... 이미 어려운 그때보단 사회에 젖어든 어른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