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제대했어. 근데 우리 생각할 시간 좀 가지자.
넌 무슨 그런 말을 제대하자마자 하니? 내가 이런 소리를 들으려고 1년 8개월을 기다린 줄 알아?!
따지고 싶었지만, 5년이란 세월 동안 녹이 쓴 우리의 관계에선 따지는 것조차 에너지 낭비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내가 보낸 답장은
제대 하루 만에 생각할 시간 갖자는 건 헤어지자는 거지. 헤어지자 그냥 이었다.
2013년 20살, 새 학기가 시작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벚꽃에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시작했던 연애가 5년이나 흘러 결국 2018년 6월 5일에 이별을 맞이했다. 5년이나 만났으면 헤어질 때 많이 슬펐겠어요.라고 나의 과거 연애사를 얘기하다 보면 많이들 물어보곤 한다. 하지만 권태기를 넘어 그냥 무미건조해진 나는 오히려 헤어진 사실에 시원한 해방감을 느꼈다.
이제 더 이상 하나의 일인 것처럼 의무적으로 데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고, 집에서 하루 종일 누워 좋아하는 드라마, 영화를 몰아서 볼 수 있고, 내가 늦게까지 술 마시고 놀아도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게 너무 행복했다. 다만, 이별을 하더라도 나에 대한 존중과 예의 없음에 화는 났다.
시간이 남아 돌아서, 여유가 있어서 1년 8개월을 기다린 게 아닌데. 그래도 만날 땐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존중과 배려를 보여준 나와 달리 그의 이별 통보는 나에 대한 존중도, 배려도 없었다는 게 화가 났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군대에 있을 때도 그는 나에 대한 배려가 전혀 없었다.
회의 때 시도 때도 없이 전화가 울리길래 봤더니, XX의 전화였다. 나중에 서로 타이밍이 맞는 시간대에 전화를 걸어 문자를 먼저 보내달라 요청했었다. 그 당시 나는 회의가 많은 예능작가의 막내 작가였고, 그 회의는 장거리 마라톤 회의처럼 끝이 날듯 끝이 나지 않았기에 문자를 보고 전화를 할 수 있다면 내가 걸겠다고 말했었다. 그는 알겠다고 했지만, 그다음에도 그 다음다음에도 지독하게 전화를 걸었다.
군대에 있는 사람도 힘들겠지만, 나 역시 남자 친구가 있지만 없습니다. 와 같은 곰신으로서 힘든 점도 있었다. 간혹 외로울 때 외롭다고 말을 꺼내면 그래도 남자 친구 있는 사람이 되었고, 힘들다고 XX한테 말을 꺼내면 군대가 더 힘들다는 말이 돌아왔다. 일터에서 치이고, 인간관계에서 치여 정신과에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위태로운 순간에도 그는 온전히 본인만 생각했다.
이 글을 언 해피 청춘에 쓰는 이유는 내가 겪은 건 헤어짐 하나뿐이지만, 인간과계에 대한 생각과 연애에 대한 생각을 많이 변화시켜 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가령 친구들이 헤어졌다고 연락 오면 뛰쳐나가 위로를 해줬지만 막상 내가 헤어졌을 땐 바쁘다며 얼굴만 빼꼼 비치고 사라지는 친구들. 연애할 때 최선을 다해 사랑하면 헤어질 때 오히려 미련이 없다는 것. 뭔 짓을 해도 떠날 인간은 떠나고, 옆에 있어줄 사람은 있는다는 것. 나는 이 모든 걸 저 헤어짐 하나로 전부 깨달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XX는 다른 여자가 있었고, 건방진 태도로 인해 친구들을 모두 그를 떠났으며 그 후로 다른 사람을 만나 행복하게 지지고 볶고 살든가 말든가.
25살, 나한테 "네가 제일 먼저 결혼하는 거 아냐?"라고 했던 친구들은 나보다 먼저 결혼해 애 낳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며, 나 역시 지금은 좋은 사람을 만나 서로 배려하며 사랑이란 모양을 둘이 서로 만들어 가는 중이다.
사람은 미워하더라도, 추억은 미워하지 말라고 그래도 20살부터 25살까지의 연애하는 기간 동안 온전히 불행했던 게 아니라 행복했고, 즐거웠던 기억도 있기에 언 해피 청춘시대지만 띄엄띄엄 해피 청춘시대로 만들어줬던 그 XX한테 미세먼지만큼은 고마움을 느낀다.
이런 소재를 쓸 수 있게 해 줘서 고맙고 살면서 절대로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