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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 Jun 22. 2024

공감 0% 최악의 빌런이 책을 냈다.

애니! 나 샐러드 하나 부탁! 땡큐!




모바일 프로그램 작가로 일하던 당시, 점심시간만 되면 연락해 샐러드를 부탁하던 PD님이 계셨다. 한두 번이면 호의로 해줄 수 있었겠지만 몇 달이 되어가니 그땐 샐러드의 'ㅅ'자만 봐도 PTSD가 오는 정도에 이르렀다. 회의한다고 나가놓고 하루 종일 자리 비우더니, 다음 날 화려한 네일아트로 돌아오던 그녀, 미팅 있다고 나가더니 운동하고 샤워까지 싹 하고 오던 그녀. 나의 20대를 되짚어 봤을 때 기억에 남는 빌런이 무지하게 많지만 그중에서도 Best do best는 바로 S피디다.






"무슨 샐러드 심부름 가지고 빌런이라 그래...?"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는 샐러드 심부름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여전히 그녀와 나눴던 대화가 남아있음에 다행이라 느껴진다. 매번 회의실 예약을 부탁하는 건 물론, 휴가인 날에도 굳이 굳이 연락해 업무 얘기를 하던 그녀.


"방송작가라면 그게 당연한 거 아냐?"라고 말한다면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고 반박하고 싶은 마음이다. 회의실은 필요한 사람이 예약하는 것이 원칙이고, 그런 업무를 할 사람이 필요하다면 비서를 채용해야지 어련히 담당 프로그램이 있는 작가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건 그 당시엔 갑질로 밖에 안 보였다.


뻔뻔하고 아무렇지 않게 심부름을 시키는 S피디의 행동만으도 충분히 빌런이지만, 그녀가 최악의 빌런이 된 사연은 따로 있었다. 사연을 바탕으로 MC들이 조언을 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구성 회의 시간에 사연을 가지고 의견을 주고받는 시간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가장 힘든 건 공감 0%의 S피디를 설득시키는 일이었다.



� 왜 헤어지면 괜히 좋아하는 음식 먹다가 울고 그러잖아요. 그러면서 너무 맛있다고 얘기하고 사실은 슬픈 건데. 예를 들면 오징어볶음 먹다가 '이런 맛은 처음이야ㅠㅠ너무 맛있...흐엉'하는 것처럼요.

� 으잉? 왜 울어? 그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어서?

� 아뇨. 그게 아니라, 감정은 슬픈 상태인데 사람들이 걱정할까봐 너무 맛있어서 우는 거라고 얘기하는 거죠.

� 세상에, 왜 그런 행동을 하는 거지? 난 이해가 안 되네. 오징어볶음을 왜 처음 먹어보지? 어떻게? 돈이 그렇게 없나?



S피디의 말에 모두 입이 떡-하고 벌어졌다. 돈이 없어서 못 먹어봤겠는가, 이별했을 때의 마음을 공감을 하지 못하는 피디에게 우리는 모두 달려들어 그녀를 설득시켰고, 결국 그 아이템은 방송이 되었다. 오프 더 레코드라 더 깊게 얘기하지 못하지만 하여튼 그녀는 그 당시 일하던 층에서 소문난 빌런이었다.



그 후 퇴사하고 그녀를 잊고 산 진 1~2년이 흘렀을까? 이상한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녀가 책을 써서 출판을 했다는 것. 여러 매체를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공감 제로였던 PD가 어떻게 공감 100%를 이끌어 내는 책을 썼단 말인가. 물론 혼자 쓴 책은 아니라는 게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정말 그 책을 본인이 다 직. 접 썼는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진실은 모르니,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내가 가까이서 지켜본 S피디는 절대 좋은 피디가 아니었다. 능력 있는 피디도 아니었다.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며, 남들이 받을 상처는 신경도 안 쓰던 사람. 자극적인 콘텐츠를 만들려고 할 때마다 주변에서 말려야 했던 상식이 좀 벗어났던 사람. 핑거프린세스처럼 손가락으로 검색해서 찾아보는 게 아니라, 나와의 채팅창을 켜서 나에게 물어보고 시키던 사람.


출처 : 구글 이미지



아직도 서점에서 S피디의 이름이 적힌 책을 보면 심장이 쿵쾅거리고, 몸이 오들오들 떨리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그만큼 나에게 S피디는 더러워서 피하고 싶었던 상대,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로 기억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나는 너무나 싫어하지만, 누군가에겐 그 사람의 말이, 그 사람의 업적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든다.



어쨌든 누군가의 꿈을 이룬 사람이니까. 누군가는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할 테니까 말이다. (당시 일할 때도 방송국 바로 근처에 살며 돈이 많기로 유명했다. 나 또한 돈 많은 그녀의 삶이 부러웠긴 했다.) 그럼에도 멋모르던 20대 청춘 시대 때도 내가 그녀를 보며 느낀 건, "저런 어른은 되지 말아야지"라는 것.



살아가면서 빌런을 만난 다면, 부디 멀리서 희극인 채로 만나시길 간절히 바란다. 가까이 만나는 순간 샐러드 심부름만 할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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