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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 Jul 17. 2023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

허영의 그림자 속 예술의 향유 - 11. 인간실격


혐오스럽다는 단어 그 자체로도 어찌나 끈적하게 불쾌한지, 명랑한 포장지 뒤의 끝없는 늪 같은 애정결핍. 명랑하게 표현하였기에 마츠코의 일생은 더욱 선명하게 최악의 결핍된 인생으로 그려졌다고 했다. 모순된 핀트를 잘 이용했지만 그다지 매력적이지는 않다고, 우주는 말했다. 어쩌면 어두움 또한 미를 가진 자들만이 향유해야 하는 전유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주는 유독 서정적 묘사를 좋아했다. 서정적이고 아름답고 차분하고 담백한 그런 영화. 물론 영화는 담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마츠코의 일생에는 정신 사납게 사건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한결같은 마츠코의 대응은 담백하다는 형용사를 들이밀기엔 역부족이었을까. 우주의 반응은 냉담했다. 


인간 실격에 이어 엉망으로 뒤덮인 인생을 함께 엿본 둘은 쉬이 두 주인공을 인용하곤 했다. 아니, 인용은 지수가 원했던 것이었다. 우주는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유쾌하게 풀어낸 그 영화는 지수의 인생을 비춰 보이는 듯해서 본인의 메타포로 삼고 싶어 했지만 그는 안될 일이었다. 우울함도 섹시하게 묘사한 다자이 오사무는 당연히 안될 사람이고, 광기가 서린 불안함에 찐득하게 주변인들에게 애정을 갈구하는 모습의 마츠코조차 과분한 비유였다. 우주는 지수에게 언제나 그렇게 말했다. 너는 아름답게 정제된 폭력이 아니라고, 멋도 없이 지독하게 끔찍한 존재라고. 그런 언어적 학대는 어쩌면 섹시했을까. 


서럽게 울면서도 지수는 굽히지 않았다. 단연 본인은 마츠코라고. 죽음조차 하찮고 천박하게 묘사될 만큼 화룡점정을 찍은 그 최악은 더 밑이 없을 테니 그 완전한 완벽함은 본인 것이라고 믿었다. 그렇게 까뮈의 이방인이 낯설지 않고, 카프카의 벌레가 된 듯이 끝없이 우울한 글들을 허겁지겁 모아서 읽으며 더욱 편안하게, 포근하게 마츠코인 본인에게 잠겼다. 이 또한 극치의 아름다운 비유이니라. 사실 주인공은 지수가 아니라 우주였으리라. 우주는 마츠코였다. 언제나 아름다워야만 하는 본인은, 언제나 밝은 사람이어야 했던 마츠코와 다를 바가 없었다. 애정을 바라던 마츠코는 노골적으로 원하는 것을 드러냈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스스로를 이미 사랑받고 있으므로 표현한 우주는 방식이 달랐을 뿐 결핍이 덜하다고 보기 힘들지 않을까. 우주가 마츠코에게 냉담했던 이유는 간단했다. 본인이었다. 원치 않을 만큼 과하게 솔직하고, 여실 없이 모든 걸 드러내 버린. 너무도 알았기에 미워한 것인지 애써 눈 가리고 모르는 척 치워버리는 것인지 우주조차 알 리 만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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