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소설
서점에 가면, 항상 보라색 배경의 표지 때문에 눈길이 가는 책이었다. 대도시의 사랑법, 제목도 꽤 마음에 들었고.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을 때, '책의 겉표지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된다'는 교훈이 말 그대로 적용되었음을 깨달았다.
예상하지 못한 것 투성이었다.
먼저, 장편소설인 줄 알았는데, 단편소설이었다. 장편소설이 좋긴 하지만, 기왕 빌렸으니 끝까지 읽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책을 들었다. 둘째로,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사랑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랐음에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듯, 다르지 않아서 오히려 좋았다.
단편소설이었지만, 장편소설이었고. 다른 사랑인 줄 알았으나, 같은 사랑이었다.
단편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으나, 모든 단편에 '영'이라는 한 사람의 화자가 동일하게 등장했다. 그래서 장편소설 같았다. 각자 다른 매력을 가진 단편들이 모여 '영'의 사랑 이야기가 되었다.
퀴어 문학이었지만, 굳이 퀴어 문학이라고 명명할 이유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모든 사랑하는 마음은 예쁘고, 서툴고, 때로는 구질구질한 것을. 나는 어느새 친구의 자취방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알이 두꺼운 안경을 쓰고, 맥주 한 캔을 곁들이며 친구의 남자 친구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때로는 '오-' 환호를 지르기도 하고, 깔깔 거리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정적 속에서 고개를 마냥 끄덕이기도 하고.
자조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가 좋았다. 냉면집의 발깔개를 보면서도, 많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서 좋았다. 일상의 작은 소재들이 글거리가 되었고, 내 마음을 울렸다. 마음에 드는 구절이 많아서, 어떤 장은 그대로 옮겨 적기도 했다. 감히 문장 하나만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문장 여러 개가 엮여서, 의미가 완성되었다.
#재희 #우럭 한점 우주의 맛 #대도시의 사랑법 #늦은 우기의 바캉스
'재희'에서 '재희만은 입을 다물었어야 했다'라고 말하는 '영'이 느끼는 서운함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 것만 같았다. 우정도 또 다른 의미에서 사랑이었고, 두 사람의 관계였다. 영원할 수 없는 우정을 회상하는 장면들이 생생하게 와 닿았다. 지나가버린 것을 어쩌겠어, 쿨한 척 웃으면서도 누구보다 그 추억들을 마음 한편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을 화자가 그려져서 귀여웠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이었다. 제목이 참 심오하게 느껴졌는데, 글을 읽다 보니 참으로 중요한 부분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랑에 빠지는 '영'의 모습이 지극히 현실적이면서도 낭만적이었다. 모든 이야기 속에서 '영'은 사랑을 아끼지 않는다. 누군가는 왜 저렇게까지 사랑할까?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겠지만, 나는 앞뒤 따지지 않고 사랑에 흠뻑 젖어버리는 '영'이 좋았다. 사랑도 최선을 다하면 아쉬움이 없으니까.
이 소설에는 흔히 말하는 애인과의 사랑 말고도, 친구, 부모와의 사랑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엄마의 투병이다. 자칫하면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를 가볍게 풀어내는 작가의 인생 짬밥은 도대체 얼마나 되는 것일까, 마음에 근육이 얼마나 많으면, 감당하기 어려운 감정과 현실들을 이렇게 쉽게 승화해내는 것일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여기에 이르기까지, 마음에 수많은 굳은살이 자리잡기까지 얼마나 힘들었을까, 감히 적히지 않은 '영' 혹은 작가의 아픔을 헤아려보았다.
이러한 성향은 '대도시의 사랑법'과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도 '카일리'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영'은 카일리를 자신의 일부로 안고 살아간다. 규호는 그러한 '영'의 전부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두 편 모두 '규호'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단 한 번이었지만, 규호와 있는 그대로의 사랑을 나누게 되어 기뻤다. 그리고 마지막에 '영'이 규호를 떠나보내고, 글로 규호와의 사랑을 붙잡아두려고 하는 모습이 슬펐다.
사랑만큼의 역할은 아니지만, 그래도 '영'에게 글쓰기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진짜 규호는 없지만, 적어도 글을 쓸 때만큼은 그 누구의 방해도 없이 마음껏 혼자 사랑을 추억할 수 있으니까.
퀴어 문학도 그냥 문학이 되고, 이야기의 소재가 아니라 소재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실력에만 놀라게 되는 그 날을 기다려본다. 어떤 사랑을 쓰더라도, 대도시의 사랑법처럼, 사랑을 진실되게 묘사하는 것이 내게는 가장 중요한 것 같다.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