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veil Sep 13. 2020

빛의 과거

책/소설

 소설을 읽는 내내 공감되는 상황과 문장들이 많았다. 나이가 들면서, 내가 느끼는 새롭고 불편했던 감정들이 무엇이었는지 대신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다지 밝지 않으면서도, 어둡지 않은 소설이었다. 마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면서도, 혼자 지내는 것을 좋아하는 내 모습처럼.


 '빛의 과거'라는 말 그대로, 이 소설은 과거의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과거의 순간은 마치 그때 쓰인 일기처럼 생생하다. 하지만 과거의 것들이 침범하려고 하는 현재의 모습도 함께 보여준다. 그리고 과거의 순간에도, 그때의 과거를 바라보는 유경의 생각과 느낌들이 묘사되어 있다. 시대 배경을 비롯해 다채로운 소재들이 있지만, 내게 가장 와 닿은 것은 '현재의 내가 바라보는 과거'라는 소재였다.


 유경의 모든 생각들에 크게 위안을 받았고, 공감했다.


 "남들에 의해 소환되는 그 시절의 나도 싫었고, 그들이 알고 있는 그 시절의 나인 척하고 있을 게 분명한 현재의 나도 싫었다. 빛의 과거, 18p "

 

 나는 평소 만나지 않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어렵다. 나는 많이 달라졌는데, 그들은 예전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괜스레 돌에게 미안해진다.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는 긴 시간 동안 바람에 깎이고, 또 다른 돌과 부딪히고, 강에 침식되며 점차 모습이 달라졌을 텐데, 내게는 현재 돌의 모양이 원래부터 그랬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나도 남들을 과거의 한 순간이 그들의 전부인 양 기억하면서, 남들도 나를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보는 것이 싫다. 남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불편하고, 내가 남을 바라보는 시선도 내게는 스스로의 모순처럼 느껴져서 괴롭다. 그래서 과거의 순간을 현재에 재현하고자 하는 것이 내게는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나는 그 누구보다 과거가 그립다. 주인공 유경은 여자대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한다. 그러나 한때는 누구보다 가까웠고, 가장 많은 시간을 보냈던 친구들이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도 기숙사 생활을 경험했기 때문인지 주인공에게 공감했다. 졸업을 하며, 매일매일을 함께했던 친구들과의 헤어짐이 슬프고 버거웠다. 그런데 시간은 언제나 그렇듯 흘러갔고, 그때의 눈물과 아쉬움이 무색할 정도로 현재는 또 다른 것들로 가득해졌다. 하지만 언제나 내 마음 한편에는, 그때의 시간들이 있다. 힘들 때에는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을 떠올리며, 편지를 읽으며 힘을 얻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때와의 간격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리움도 깊어진다.


 유경이 이동휘와 기숙사에 돌아가던 그 길의 모든 것을 선명하게 묘사한 글처럼, 내게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선명한 시간들이 있다. 그때의 온도, 주변을 감싸는 소리, 빛과 어둠의 정도, 모든 것이 생생하다. 가끔 수면 위로 기억이 떠오를 때, 마음이 뭉클해진다. 지나간 것들은 모두 아쉽고 소중하다.


 희진은 유경과 달리, 가벼운 사람들은 일회성이라며, 과거를 현재에 데려오는 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그래서 희진은 유경과 동휘를 만나게 하는 것도 그다지 실례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자신의 소설책에도 과거의 추억을 쉽게 그려 넣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 전반적으로 나는 희진이 무례하게 느껴졌다. 내가 예민한 것도 맞다. 하지만 현실에는 희진과 유경처럼 유지되는 관계가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기에, 희진을 굳이 쳐내지 않는 유경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도 유경처럼, 가끔 인파가 북적거리는 길을 걸으면서, 나를 스쳐 지나갔던 사람들을 떠올릴 때가 있다. 한때 누구보다 친했던 친구들의 소식을 알지 못한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좋지 않다. 같이 현재를 살아가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우리가 공유하는 시간은 그 순간뿐이라는 게 슬프기도 하다. 그 사람과 함께한 순간의 농도는 매우 짙고, 아직까지도 기억이 선명한데 말이다. 오히려 친하지 않은 어떤 이의 소식은 들리는데, 한때 중요했던 이의 행복하고 슬픈 순간들을 전혀 알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마, 용기를 낼 수 없을 것 같다. 변명을 하자면, 내게 과거가 너무 소중해서인 것 같다. 과거가 소중하기 때문에, 이제 자주 만나지 않지만 기억 속에 있는 친구들도 소중하다. 그래서 희진처럼 가벼운 관계, 일회적인 만남이라고 치부하며 별생각 없이 만날 수가 없다. 현재를 함께하지 못하는 대신, 과거에 함께했던 순간의 좋은 기억만큼은 그대로 간직하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희진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은, 문제를 직면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분명 다시 봐도 괜찮은 만남이 있을 텐데,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유로 기회를 차단해버리는 것이니까. 마치 '비관이 가장 손쉬운 선택'이라는 유경의 말처럼. 새삼스럽지만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인연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것을 느낀다. 나의 모든 세월을 함께하며, 나를 점이 아닌 선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함을 느낀다.


 더불어 동휘와의 잔잔하지만 애절한 러브 스토리도 정말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설레기도 했고 슬프기도 했다. 미팅을 할 때, 고전 소설 주인공들의 이름을 따는 것도 뭔가 낭만적이었다. 기숙사로 가는 길에 팔짱을 꼈을 뿐인데 설렜다, 마치 8월의 크리스마스처럼. 이동휘의 단호한 처신이 마음에 들기도 했다. 이동휘와 유경이 현재에 다시 재회했으면 좋겠다는, 소설 같은 바람도 한 번 가져보았다. 그리고 지워진 전화번호를 알아보려고 노력하는, 그리고 흐느끼는 유경의 마음에 이입하여 눈물도 흘렸다. 이 소설의 중요한 지점에 내가 반응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인상적인 지점들이었다. 은희경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고 싶어 졌다.  


(사진 출처 : 문학과 지성사)

매거진의 이전글 소년이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