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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il Sep 05. 2020

소년이로

소설


 이 소설은 단편 소설 모음집이었다. 각각의 이야기가 너무 다르지만, 전반적으로 비슷한 분위기가 깔려 있다.


 리뷰를 살짝 보다가, 더 이상 편혜영 작가의 소설은 읽지 못할 것 같다는 글을 보았다. 재미없거나 별로여서가 아니라, 글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분위기를 견디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가슴을 졸이며 봐야 하는 영화들을 잘 보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을 견디는 게 꽤 힘들기 때문이다. 나도 항상 밝은 분위기의 글, 몽글몽글하거나 마음을 적시는 감동적인 글, 상처나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이 시간이 흘러 결국에는 괜찮아지는 그런 따듯한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래서 내게도, 어둡고 무거운 공기가 지배하는 이 소설이 평소 선호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절대 쓸 수 없는 재질의 글이라서 그런지 넋을 놓고 읽게 되었다.


갑자기 친구가 감당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놓는 기분이었다. 그 친구는 내게 조언 따위를 기대하기는커녕, 그냥 나는 이런 일을 겪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고, 사실적으로 전해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도 묵묵히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리고 때로는 그 주인공들의 기이한 마음에 이입하게 되었다.


 내가 느낀 가장   소설의 특징은 말하기 어려운 상처나, 모순, 위선 등이 선명하고 비교적 쉽게 묘사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나란히'에서 온 몸에 개미가 기어다니는 것 같다는 기분, '식물애호'에서 자동차 사고 직후의 느낌, '개의 밤'에서 할머니 집의 모습을 묘사한 것 등이 그렇다. 그런데 이 건조한 문체는 마음을 울린다. '다음 손님'의 마지막 부분에서 결국, 아버지처럼 어머니를 돌보게 된 주인공은 남 이야기하듯 자신의 미래를 예언한다. 그 예언이 그대로 적중될 것임을 알기에, 담담한 화자와 달리 내 마음은 부서지는 듯했다.


 이 소설은 전혀 위로를 건네고 있지 않다. 그냥 주인공의 시간과 사건이 흘러가게 둔다. 굳이 위로에 가까운 것을 찾자면 '우리가 나란히'에서 우지가 87일 만에 나를 찾고, 대화 끝에 내가 긁기를 멈춘 것, 정도인 듯하다. 이 단편 소설들의 주인공들은 솔직하다. 나쁜 마음도 가감 없이 털어놓는다. 그런데 주인공들의 나쁜 마음을 탓할 수가 없다. 사실은 나도 그런 생각을 하니까.


 '원더박스'에서 수만은 아프다. 억울하게 사고를 당했다. 아픈 수만은 병실에 누워 매일 같이 '누구 잘못인지'를 묻는다. 수만의 부인인 소영은 어느샌가 그런 수만의 물음에 싫증을 느끼며, '나는 누구 잘못으로 종일 간병을 하느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마지막에 수만은 자신이 저주하던 김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한다. 그리고 그런 소영은 수만은 당신 탓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어 한다. 살다 보면 찰나에도 상반되고 복잡한 감정들이 교차한다. 분노나 화가 끝까지 차올랐다가, 한없이 너그러워지기도 한다. 겉으로 표출되지 않는 주인공들의 순간의 감정과 생각을 모두 읽는 나는 그들의 옳고 그름을 평가할 수 없었다. 그냥 그럴 수 있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이유는 등장인물을 이렇게 만든 것은 현실이었고, 그런 현실 속에서 누구나 '정답' 같은 선택을   없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잔디'에서 임시교사에게 잘못을 저지른 남편을 둔 '나'는 자신의 모순을 고백한다. 남편을 원망해야 하는데, 임시 교사를 원망하는 마음이 든다고. '나'는 임시 교사를 원망하는 마음과, 그리고 그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남을 탓하는 자신의 모순 때문에 이중으로 괴로워한다.


 그들의 잘못은 자발적이지 않다. '개의 밤'에서 잘못을 저지른 동생은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해주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 잘못을 크게 고치지 않고 방관하는 지명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화자들은 상황이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음을 인지하고 있다. 방관하기도 하며, 협조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이 짊어진 삶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마치 자로 그은 듯 옳고 정직한 행동을 바랄 수 없다. 그리고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라서 욕할 수가 없다.


 그들을 이렇게 만든 시작점도 보이지 않는다. 많은 것들이 뒤엉켜 있다. '다음 손님'에서 치매에 걸린 외할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하는 아버지를 욕할 수 없었다. 실망스럽고, 또 모순적이지만 나무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원래 외할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외할아버지는 아버지를 무시하고, 핍박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행동이 용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아버지를 질책할 수도 없다. 기껏 해봐야, '왜 그랬어. 도대체 왜. 그런 사람 아니잖아 원래.' 이 정도의 울부짖음. 그런데 이 울부짖음이나 질책 없이도, 아버지는 스스로의 괴로움에 일그러진다. 삶에 닥치는 불행이라는 것은, 때때로 원인이 없다. 그런데 결과는 너무나도 명확하고 치명적이다. 그 결과를 정당화하거나 바로잡기 위해서는 불행에 조금 기여한 것처럼 느껴지는 '나' 혹은 '남'을 탓하는 수밖에.


 뭐든, 결과만 놓고 보면 잘잘못을 따지기가 쉽다. 그런데  결과에 도달하기까지의 모든 생각과 감정, 상황을 알게 된다면 잘잘못을 따지기가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에게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관대하지 않은 것이다. 나의 것은 다 알지만, 남의 것은 하나도 모르니까. 이 소설 속 화자들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삶에서 '나'일 수도 있고, '남'일 수도 있다. 만일 그게 '나'라면 스스로에게 지나치게 엄격하게도, 관대하게도 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남'이라면 평가를 유보하고, 조금 더 이해해보려고 노력해야지.


 대부분의 소설이나 드라마에는 실패를 극복하는 이상적인 등장인물들이 많이 나온다. 그들이 겪는 불행이나 어려움은 정도가 다를 뿐, 대부분 극복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다. 내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내가 해온 것과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올 때도 많다.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갑자기 인생이 접어들었을 때, 내 모습도 예상하기가 어렵다. 이 소설은 현실의 끝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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