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에 한 친구가 내게 물었다.
“만약 타임머신을 타고 내 마음대로 과거로 갈 수만 있다면 어느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
“음, 글쎄. 생각 좀 해봐야겠는데. 원시시대?”
“아이고, 하여간 너는 참 특이해. 나는 중세 시대로 가고 싶어. 책에 보니까 유럽에서 드레스 입은 여자들이 너무 예뻐 보이더라. 이왕이면 이런 교복 말고 예쁜 옷 입고 귀족처럼 살고 싶다. 로미오와 줄리엣 영화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말이야.”
이때의 대화는 사춘기 소녀의 감성으로 깔깔대며 웃었던 에피소드로 남아있지만 이후에도 나는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 1987)’나 ‘닥터 후(Doctor Who 1963년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각색되어 방영)’와 같은 프로그램을 접할 때 한 번쯤은 경험해 보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타임머신의 원리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관련 서적을 찾아보기도 했다. 복잡한 과학 이론을 대부분 이해할 수 없어서 도중에 내려놓았지만 그 후로도 ‘과연 과거로의 회귀가 가능한 일일까’ 반신반의했다. 시간 여행이 과연 언제 가능할지 알 수는 없으나 현재는 시간 역행이 불가능하다는 사실만큼은 변함이 없다. 오로지 직진으로 향하는 시간만 존재한다.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어 결혼할 때까지 시간에 대해 별다른 아쉬움을 느끼거나 특별히 느리다거나 빠르다는 인식을 하지 못하고 살았다. 아이가 태어나고 성장하는 동안 어느새 훌쩍 자란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나 또한 순식간에 나이를 먹어 문득 시간이 전과 달리 속도가 유난히 빨라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특히 육아로 정신이 없다 보니 아이들이 어서 컸으면 하는 마음이 든 어느 날, 지인에게 이런 속마음을 내비쳤다. 마침 나와 비슷한 연령이고 아이도 동갑이어서 서로 대화를 나누다가 아이들이 어서 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니 지인이 이렇게 반응했다.
“힘들긴 하지만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저 상태 그대로 머물렀으면 할 때도 있어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저 모습 그대로 머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 순간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수긍하면서도 기쁘고 좋은 순간은 더욱 빨리 가는 것 같아 아쉬움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시간이 멈추길 바라는 마음이 이해는 가지만 세상의 이치가 그렇지 않은데 어쩌겠나 싶었다. 동화 ‘피터 팬’에 나오는 소년처럼 자라지 않는 아이는 동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니 말이다. 현실은 동화와 다르지만 추억이 있기에, 시간의 흐름에 따라 경험과 추억이 쌓이기에 이런 특정 순간이 더욱더 소중하다. 사람들이 열심히 사진을 찍고 일기나 감상과 같은 글을 쓰는 이유는 바로 기억 속에 그 순간을 오래오래 남길 바라서일 것이다. 당분간 다시 찾아보지 않더라도 찍고 기록하는 행위를 통해 조금이나마 시간을 지연시키기라도 하듯이.
때로는 기록의 행위를 벗어나 인생의 선배로부터 지금 이 순간의 행복과 감사를 배우기도 한다. 부모 입장에서 아이들이 어릴 때 늘 귀엽고 사랑스러운 순간만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아이의 고집이나 미성숙한 언행으로 몸과 마음이 지쳐 끝이 안 보이거나 상황이 변하기는 할까 의심이 들기도 했으니까. 나의 이런 마음을 눈치채신 시어머님은 그래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아등바등 살 때가 좋을 때라고, 아무리 정신없고 힘들어도 막상 자식이 둥지를 떠나면 시간이 언제 그렇게 빨리 지나갔나 싶어 그리 홀가분하지만은 않다고 하셨다.
‘시간은 금’이라고 했던가. 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가장 가치 있다고 평가받는 금속에 속한다. 다이아몬드의 경우 아름다움과 희귀성 때문에 보석으로 인기가 높지만 경제적 가치가 높은 금은 상대적으로 안정성과 환금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이 금 못지않게 귀하고 비싸다는 의미로는 뭔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단 1초의 시간도 살 수 없으니 말이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일이다. 친척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 부동산 투자로 수익을 엄청나게 올린 분이 계셨다. 조카뻘 되는 친척들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며 정말 부럽다는 말을 반복하자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약 내가 번 돈 다 줄 테니 자네의 젊음과 맞바꾸자고 하면 해 줄 수 있나? 더도 말고 딱 십 년만 바꾸자고 하면?”
이 말에 모두 말문이 막혀 잠시 조용해졌다. 세계 제일의 부호도, 아무리 혁신적인 과학계의 전문가도 시간을 만들어 낼 힘은 없다.
금을 만들고자 하는 연금술은 오랜 시간을 들여 시도된 역사지만 아직 완벽히 성공하지 못한 기술이다. 문득 연금술이 정말 가능한 것인지 성공 사례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흔히 알려진 대로 온갖 금속과 화학 실험을 이용해 금을 만들어내는 기술로만 알고 있었다. 사전을 찾아보다가 의외의 뜻을 발견했다. ‘늙지 않는 영약을 만들려는 목적의 화학 기술 고대 이집트의 야금술과 그리스 철학의 원소 사상이 결합하여 생겼다(표준국어 대사전)’는 것이다. 불로장생에 대한 꿈은 결국 동양의 진시황과 같은 개인의 집착에만 있었던 게 아니라 아프리카, 유럽 등 세계 곳곳에서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임을 시사한다. 부의 상징인 금과 시간은 모두 사용과 동시에 끝이 있어 무한히 찍어 낼 수 없는 공통점이 있다. 한번 소모되면 재생산할 수 없는 한계성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금은 시간과 같은 수준이 아니다. 물론 오랜 시간 안정적으로 금속의 형태로 남을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풍화작용으로 지구에 스며들거나 우주로 방출된다고 한다. 반면 시간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시간의 흐름 영역 안에 있는 생물과 무생물 자체가 변할 뿐. 태어나고 성장하고 사라진다. 생성되고 발전하고 사라진다.
그게 다일까? 시간의 영향을 받는 우리는 그저 우주의 한 점에서 시작해 아등바등하다가 사라지는 미물에 불과한 것일까? 시간이라는 장벽 안에서 우리는 잠깐 젊음을 만끽하다가 늙고 병들다가 가는 존재일까? 과학에서 바라보는 인간의 삶은 너무 허망하다.
신체 발달의 정점을 찍을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별로 의식하지 않기 쉽다. 나 또한 성인이 될 때지 빨리 나이가 찼으면, 빨리 시간이 흘러서 괴로운 순간을 빨리 끝냈으면 하고 바란 적이 많았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서 좌충우돌하는 육아기를 상당히 벗어나 다행이라고 여길 무렵 서서히 나는 몸의 변화를 실감했다. 언제부터인가 입가와 눈가의 주름은 물론 여드름도 아닌 작은 혹들이 생기는 등 노화의 속도가 점점 빨라진 것이다. 체력이 점점 약해지더니 이런저런 병에 잘 걸리고 심지어 녹내장 초기에 시력까지 많이 나빠져서 책조차 읽기 힘들어졌다. 호르몬은 줄어들고 몸의 기관이 지쳤는지 제대로 기능을 못 하더니 하나하나 기계 가동을 줄이거나 멈추고 있는 기분이었다.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임을 알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이라도 그 속도를 늦추기 위해 피부과에 가고 운동을 하고 명상을 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는 있다.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 부정적인 감정을 줄이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신체의 활력으로 작용하길 바라기도 한다. 그러면 나의 마음은? 마음도 시간을 타고 자라다가 늙어가는 것인지 궁금하다.
2017년 상영된 ‘원더(Wonder)’라는 영화가 있다. 예고편에서 유명한 ‘줄리아 로버츠’라는 낯익은 배우가 나오기도 하고 주인공 소년 어기(Auggie)가 우주인 헬멧을 쓴 채 침대 위를 팔짝팔짝 뛰는 모습이 인상적이라 보게 된 영화였다. 처음에는 어기가 단순히 우주에 관심이 많은 소년이구나 정도만 여겼는데 보통의 소년과 매우 다른 특징이 있었다. 태어날 때부터 안면기형이라는 외모를 지니고 태어나 수많은 수술을 하고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사람들의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힘든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한동안 엄마와 홈스쿨링을 하며 치료와 병행해야 했지만 결국 일반 학교에 다니게 된 어기는 자신을 괴물 취급하는 또래 학생들의 괴롭힘과 편견에 시달려야 했다.
영화에서 어기는 학교에서 놀림과 배타적인 대우를 받고 지쳐 돌아와 엄마에게 자신은 왜 이리 못생겼냐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엄마는 뭐라고 대답했을까?
“나를 보렴. 우리는 모두 얼굴에 흔적이 있어. 이 주름은 네가 처음으로 수술을 받을 때 생겼단다. 여기(다른 주름을 가리키며) 이 주름은 네 마지막 수술을 겪을 때 생긴 거고. 주름은 우리가 어떤 곳을 가고 있는지 보여주는 지도야. 우리가 지나온 곳을 알려주는 지도이기도 하고. 게다가 그 지도는 결코 못생기지 않았어.”/영화 원더 중에서
“Look at me. We all have marks on our face. I have this wrinkle here from your first surgery. I have wrinkle here from your last surgery. This is the map that shows us where we’re going. And this is the map that shows us where we’ve been. And it’s never ever ugly.”/from the movie scrip of wonder
이 대사가 언급되는 장면에서 엄마의 진지하고 확신에 찬 표정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다. 그때 받은 감동은 단순히 아이를 대하는 강하고 현명한 엄마의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주름에 대한 일반적인 편견을 산산조각 깨버리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주름은 대표적인 노화 현상의 하나로 인간은 대부분 피할 수 있으면 피하고 싶고 줄이고 싶어 한다. 그 저변에는 늙는 것은 슬픈 것, 나쁜 것 혹은 추한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하지만 어기의 엄마는 그 주름 하나하나 특별한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인생의 특별한 지도라고 말한다. 내가 가야 할 곳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데이터로써의 기능만 있는 평범한 지도가 아니다. 내가 밟아온 시간과 장소를 온전히 기록하고 지금 어디를 향하고 있으며 앞으로 향할 곳이 어디든 그 나름의 흔적을 새겨 줄 것 같은 예언을 담은 통찰이었다. 너의 아픔과 성장을 함께 했으니 내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결코 못생기지 않았다고 그 순간을 함께 한 너도 마찬가지라고 말한 듯하다. 두 모자의 마주한 모습은 세상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 주름이 생겼다는 것, 내 얼굴이 대부분의 사람과 다르게 생겼지만 얼마든지 아름다울 수 있다는 말을 이토록 가슴에 와닿게 표현한 말이 있을까 싶다. 시간이 간다는 게, 끝을 향해 가며 나의 변화를 지켜본다는 게 그리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성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간 속의 인간은 끝을 향해 가는 비극의 원소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내리막길을 간다고 슬퍼하기만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감정 또한 풍부한 존재라서 이유 없이 울지 않고 이유 없이 웃지 않는다.
오늘도 뚜벅뚜벅 가고 있는 시간 앞에서 시간은 과연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
시간은 매정하다.
시간은 관여하지 않는다.
시간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시간은 시작과 끝을 함께 한다.
그 어떤 사람에게도, 그 어떤 감정에도 공평하다.
아픔과 후회의 상처도 만들지만 치유의 힘도 지니고 있다.
슬픔도, 기쁨도, 분노도, 행복도 사그라들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시간은 추억을 남긴다.
주름과 흉터로 누군가 우리를 외면해도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시간은 고독한 존재지만 늘 우리와 함께한다.
생명체와 동행하다가 미련 없이 우리와 악수한다.
우리는 시간을 따라가며 아름다움을 누린다.
찬란하게 빛나는 젊음을 발견한 우리가 안도하는 순간
시간은 시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모두가 추하다며 우리를 피해도
시간은 우리 곁에 있다.
시간은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