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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지향

생각 많은 infj

by 애니마리아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수년 전 영화 <역린>에 나온 정조와 신하 사이의 대사이기도 한 中庸 23장이다. 영화를 볼 때는 속도감 있게 지나가는 현상 때문에 깊이 기억에 남지 않았다. 영화는 생각할 시간도 없이 또 다른 화면에 마음을 빼앗겨 그런 듯하다. 오히려 글로, 혹은 강연에서 접할 때 더욱 진지하게 가슴에 새기게 된다.


번역 수업 때 뵈었던 선생님의 강연을 다시 보았다. 마지막 후배를 향한 당부의 말씀에서 ‘정성을 다하라’라며 영화 <역린>을 언급하셨다. 들어보았던 문구, 한때 대사를 다시 찾아보았지만 어느새 잊고 있던 감동적인 대사의 원문을 알고 싶었다. 우선 영화의 해당 장면을 보고 대사도 대사지만 배우의 연기와 어투, 표정이 감동을 배가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작은 일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

작은 일에도 최선을 다하면 정성스럽게 된다.


정성스럽게 되면 겉에 배어 나오고

겉에 배어 나오면 겉으로 드러나고


겉으로 드러나면 이내 밝아지고

밝아지면 남을 감동시키고


남을 감동시키면 이내 변하게 되고

변하면 생육된다.


그러니 오직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역린>의 대사 중에서 예기 중용 23장을 해석한 말


정성을 다한다. 역시 좋은 말이다. 늘 추구하고 싶은 말이자 매일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실천하고 싶은 말이다.


문득 원문이 궁금해졌고, 이러한 해석이 맞는지 알고 싶어졌다.

其次는 致曲 曲能有誠이니

誠則形 하고

形則著 하고

著則明 하고

明則動 하고

動則變 하고

變則化 하고

唯天下至誠이야

爲能化니라


얼추 한자의 기본 뜻을 대조하면 誠에서 ‘정성’을 발견하고 形에서 ‘겉으로 드러난다’는 문구를 끄집어낼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작은 일에도 무시하지 않는다’는 뜻이나 ‘남을 감동시킨다’는 말, 특히 ‘생육된다’는 뜻을 유추할 한자를 찾을 수 없었다. 아마 動에서 비롯된 해석일 텐데 ‘움직이다’라는 뜻만 알고 있어서인지 그 주체나 대상이 남인지 나인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혼란의 감정이 있다. 나의 어리석음과 무식함을 보건대 절대적으로 틀릴 수 있으나 우리의 정서에 맞게 어느 정도 윤문 되어 덧붙여지고 편집된 부분이 있지 않나 추측해 본다. 가끔 사소한 것에 집착해 이리저리 찾아보는 습성이 있기에 다른 해석도 찾아보았다. 아니, 책을 충동구매하여 23장을 찾아보았다. 인터넷의 블로그나 AI의 답변은 제각기 다르거나 이미 드러난 영화의 대사만 반복할 뿐이었다.


『마음으로 읽는 중용』(이종인, 명문당, 2024)의 해설을 살펴보니 영화 대사와 유난히 다른 부분 몇 가지가 눈에 띈다.


그다음은 한 분야 즉 자기가 하는 일을 잘하는 것이며,

성誠하여야 하는 일을 잘할 수 있다.


성誠하여야 꼴을 갖출 수 있고,

꼴을 갖춘 뒤에 드러날 수 있고,


드러난 뒤에야 빛나고,

빛난 뒤에 움직일 수 있고,


움직일 수 있어야 바꿀 수 있고,

바꿀 수 있어야 다른 것과 잘 어울릴 수 있다.


세상의 지성至誠만이

다른 것과 잘 어울릴 수 있다.


용어가 다르고 조금 딱딱하게 느껴질 뿐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확실히 윤문보다는 직역에 가까운 해석의 느낌이다. 하지만 주제는 동일하다. 誠 성, 즉 정성이다.

어린 시절부터 종종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들어서인지 노력이나 최선은 내게 좌우명이자 부담으로 다가왔다. 정성을 다하기, 최선, 노력. 좋은 가치이자 때로는 숨 막히는 말이기도 하다. 혹자는 노력하지 말라고, 너무 애쓰지 말라고 한다. 그냥 무난하게, 적당히 즐기면서 살라고.


정성을 다하며 사는 삶은 힘겹고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후회는 덜하다. 그래서 멀리하고 싶다가도 다시 돌아가게 된다. 손을 잡고 걷게 된다. 정성은 성실하려는 마음, 최선을 다하는 마음, 집중하는 마음이다.


노력을 하면 그래도 노력했어,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어도 최선을 다하면 다음 날 에너지가 사라지는 것 같다. 그러다 버겁기도 하다.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모든 면에서 다 잘해야 할 것 같아서다. 그만큼 좌절도 크다. 엄마로서, 아내로서, 딸로서, 며느리, 친구, 사회인,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한 생명으로서...


‘정성의 마음으로 노력했어. 최선은 아니었지만’은 어떨까. 어제도 노력했으나 조금 부족했고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다. 오늘은 너무 과했고 피곤함을 핑계 삼아 쉬었다. 내일 다시 힘을 낼 거야. 다이어트 결심과 비슷한 노력 결심! 매일 정성스러운 날을 위해 정성을 다하는, 아니 정성을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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