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은 양날의 검이다
11월 27일, 올해 첫눈이 내렸다. 뉴스에서는 작년에 비해 눈 소식이 9일이나 늦었다고, 기록적인 폭설에 해당할 만큼 양이 많고 오랜 눈발을 예고했다고 했다. 과연 그랬나? 기억이 나지 않는다. 11월 중순에 눈이 왔단 말인가? 말에 온 것도 그리 늦은 것 같지 않았다. 아마 작년 첫눈은 금방 사라지는 맛보기 눈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경험상 첫눈은 아무리 많이 와도 금방 녹는 눈이 대부분이어서 그리 심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하얀 세상, 지붕, 나뭇가지에 살포시 내린 하얀 세상은 동화다. 하지만 바닥은 질퍽거리고 물이 고여 있고 튀기도 하는 지저분한 세상이다. 도서관에서 나오는 해는 이미 졌는데 바닥은 이미 흥건히 눈물(눈이 녹은 물)이 여기저기 고여있고 동시에 앙상한 나뭇가지는 빵빵한 눈 덩이들을 어깨에 잔뜩 짊어지고 있는 모습이다. 녹는 눈과 쌓인 눈, 옆으로 치워지며 지저분한 눈, 구석에 쌓이고 있는 눈발의 모습은 마치 여러 시공간을 넘나드는 카메라 기법 같았다.
낭만과 설렘이 있지만 현실 속 장면은 잔인하다. 특히 도로, 길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들. 배달원, 택배 기사분, 환경미화원 아침부터 그들의 손길이 분주하다. 애틋하다. 아, 대리기사도 있다. 일이 있으면 좋은 직업이나 이런 날씨에서 일을 해야 한다면 평소보다 힘겨울 터인데.
흩날리는 눈발이 아름답지만 눈을 치워야 하는 장병 생각이 난다. 군대 간 아이의 고생이 보이는 듯하다. 아이는 알고 있었을까? 첫눈이라 그저 설레기만 했을까. 군대에서도 눈을 치워야 할까. 순간 헷갈린다. 하루가 아니라 이삼일 계속된다 하니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기분이 좋다가도 면접 준비로 추운 날씨에도 스터디 모임, 학원을 떠돌며 방황하는 둘째가 안쓰럽다. 아니나 다를까 밤중에 귀가 한 아이는 엄청난 눈과 쌓인 눈의 풍경에 다소 놀란 눈치다. 목소리에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
"여기가 무슨 삿포로 같아. 다니지 않는 도로나 나무, 높은 곳에 눈이 쌓인 모습이."
삿포로. 지난겨울에 가족 여행으로 일본에 갔을 때가 떠오른다. 그곳의 눈은 정말 역대급이었고 생전 보지 못한 동화 속 풍경처럼 곱게 쌓인 뭉치 눈이 많았다. 우리나라처럼 습도가 많지 않을뿐더러 깨끗하게 쌓인 눈의 모습이 어찌나 이국적으로 보이던지. 대신 제설차가 수시로 돌며 길을 닦고 정리하는 가운데 도로 선이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데도 보행자를 위한 차들의 에티켓이 참 인상 깊었다. 그것만큼은 닮고 싶은 선진국의 모습이었다.
습기가 많은 우리나라 눈은 예쁘게 쌓일 리가 없다며 한탄했던 오전, 해가 진 저녁 집에 돌아오는 길에 잔뜩 어깨에 눈덩이를 짊어지고 있는 나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심지어 길 옆에서 억지로 썰매를 끌며 놀고 있는 아이들이 눈에 띈다. 그래 길을 정리하고 생계를 걱정하는 것은 어른들의 몫, 아이들은 아이들이다. 잠깐의 일탈을 꿈꾸며 썰매 타기를 시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귀엽기만 했다. 그때만큼은 아이의 순순함을 방해받지 않고 억압받지 않고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동화 눈의 여왕
전설 잭 프로스트
영화 겨울 왕국, 얼라이브, 설국열차
그리고 달콤 쌉싸름했던 일본 여행
미끈거리며 넘어질 뻔하던 그날의 기억 속에
눈길에서 일부러 만들어진 길이 아닌 하얀 부분을 골라 걷는 내가 있었다.
때로는 잔인하지만 그래도 하얀 길,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내디디며 어린아이가 된 내가 있다. 양날의 검처럼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한 눈이 내렸다.
올해 첫눈의 기억
설렘과 놀람과 찌푸림과 미소가 교차한 눈의 기억. 다소 이상한 눈 내림의 현상이 기온 이상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매년 보는 눈, 다시 보아도 반갑지만 너무 많이 와서 힘든 사람이 더 힘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사람의 마음도 변덕스럽게 만드는 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