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그리움, 동심, 걱정, 사랑, 그리고 희망
둘째 날, 이른 아침부터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살포시 흩날리는 눈. 예년에 첫눈으로 내렸음직한 첫눈이 올해는 첫눈이 내린 다음 날 내리고 있었다. 아무리 적게 내리는 어설픈 눈이라도 첫눈이었다면 탄성을 지르며 반가움을 드러냈을 텐데. 올해는 워낙 큰 눈과 그 여파로 쌓인 눈의 흔적이 시선을 압도할 뿐이었다. 함박눈, 가루눈, 싸라기눈, 진눈깨비. 또 뭐가 있더라. 아, 눈보라! 폭풍처럼 강풍에 휘몰아치는 눈.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의 눈 명칭은 눈을 바라보는 경이의 시선과 해학, 인간의 감정이 물씬 풍겨 나는 표현 같다.
첫눈이 온 다음 날, 집 주변을 걸어가며 관목 위에 쌓인 어마어마한 눈의 높이에 입이 벌어질 뿐이었다. 흐지부지 사라지는 첫눈과 달리 올해는 3일 연속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의 정확성이 다소 무서워질 정도로. 하룻밤 사이에 내린 눈의 마법으로 지난밤의 추억이 떠올랐다. 늦게 퇴근한 남편은 춥다며 덜덜 떨 때는 금방 잊고 이내 들어온 아이의 소란스러움에 내게 제안했었다.
"우리 눈 구경 가지 않을래? 눈이 펑펑 내린대!"
"신발도 다 젖을 테고. 추워! 이 시각에."
"그럼, 나 혼자 잠깐 다녀올게."
"강아지도 아닌데 눈이 그렇게 좋아?"
"응."
개띠도 아니고 더 이상 아이도 아닌 남편은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천진난만한 표정과 밝은 에너지에 순간 같이 갈까 하고 망설였지만 추위에 노출되면 수족 냉증에 만성 비염이 심해지는 모험을 이길 자신이 없었다.
하얀 눈이 가지마다, 푸른 잎 사이사이로 백설기처럼 내린 나무들의 모습은 그 어떤 크리스마스트리 장식보다 웅장해 보였다.
인도 한편에 누군가가 만들어 놓았을 대형 아이스크림 모형물이 하도 깜찍하고 웃겨서 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저절로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창의적인 작품이었다. 하긴 눈이 많이 쌓였다고 무조건 눈사람만 만들라는 법은 없으니까!
눈으로 둘러 싸인 세상 추운 겨울에 보기 힘든 붉은색 잎이 가녀린 몸의 얇은 스카프처럼 매달려 있다. 하얀 눈 사이로 붉은빛이 마치 보색처럼 빛나며 '나 아직 매달려 있어요, 마지막 잎새처럼' 하고 말하는 듯하다.
둘째 날의 눈길이 누군가의 고생으로 말끔히 정리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었다. 밤새 혹은 새벽에 애쓰신 그 누군가에게 감사할 뿐이다.
그날 정말 30cm 이상 쌓인 눈으로 눈 범벅이 된 길을 나설 때의 두려움이 아직도 남아있다. 함박눈이 쌓인 모습이 예쁘기도 하고 좋기도 하지만 몇 발자국 너머 도로만 보아도 일상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충격이 느껴졌다. 눈이 내리는 첫날부터 둘째 날에도 멈추지 않는 눈, 얼어가는 길을 치우고 또 치우느라 애쓰시는 분들의 노고가 보였다. 언제 그칠지 모르는 눈인데도 더 심각한 피해를 막기 위해 환경미화원, 경비 대원, 이름 모를 시민들이 최소한의 길을 마련하고 정리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이들이 썰매를 타고 신나 하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다른 쪽에서 한숨 쉬며 출근길, 등굣길, 일터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사람들을 바라보면 잠시 즐거워했던 기분조차 미안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저녁 뉴스에서 들려오는 사고 소식이 심상치 않았다. 무너진 축사의 지붕 때문에 반신불수가 된 젖소가 고통스럽게 허우적대고 튼튼해 보이던 공장 지붕이 무너져 초토화된 일터, 부상, 사망, 강원도에서 발생한 53대 추돌 사고. 아무리 쌓여도 가벼울 것 같은 습식 눈의 무게는 잔인할 정도로 무거웠다. '이런 눈도 기온 이상 때문인가, 아무리 조심해도 천재지변의 피해는 불가피한 것일까'라는 질문이 뇌리를 스친다.
눈이 그저 좋지만도, 마냥 걱정만 하기도 할 수 없는 이유는 뭘까. 눈 피해가 속속 보고되던 둘째 날 군대 간 아이가 내게 전화했다.
"아들. 평일인데 어떻게 전화했어?"
"아, 그게 이번에 눈이 워낙 많이 와서 부모님 괜찮으신지 연락해 보라고 허락해 주셨어요."
"그렇구나. 우리는 괜찮아. 아빠는 출퇴근 때 좀 힘드셨겠지만."
눈이 와서 좋기도 하고 안 좋기도 하다. 하얀 세상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제설작업으로 또 다른 고생을 하고 있다는 아들의 말에 애잔한 감정이 일기도 했다. 추위 속에 고생하는 것도 안타까운데 북한에서 쓰레기 풍선을 또 보낸다는 문자에 원망스러운 마음도 든다.
올해 눈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단순히 양가감정만 있는 건 아니다. 걱정도 있고 사랑도 있다. 그리움도 있고 두려움도 있다. 추억도 있고 동심도 있다. 인간에게는 힘들고 외로울 때도 꺼내 볼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가 있지 않은가. 의지만 있다면 꺼내 볼 수 있는 희망이 앉아 있다. 우리가 알아보든 알아보지 못하든 늘 곁에 머물러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희망은 강요하지 않는다. 그 손을 잡고 잡지 않고는 스스로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