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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어 원서

영혼의 전달자가 있다

by 애니마리아


<Human Acts>(Han Kang, translated by Deborah Smith, Hogarth, 2016)


<소년이 온다>(한강, 창비, 2024.11.8 125쇄)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있었다. 늘 같이 읽지는 않았다.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 따로 읽기도 하고 서로 다른 언어로 표현된 뉘앙스나 표현이 궁금해 함께 놓고 읽기도 했다. 하나의 자아처럼, 한 존재의 복수의 자아처럼 혹은 도플갱어처럼 조심스럽게 읽고 있다. 활자로 남긴 작가의 발자취와 생각을 따라가며.




You would like an oil-and-honey pastry with a conspiratorial grin, and your grandmother would smile back at you, her eyes creasing into slits. Her death was every bit as quiet and understated as she herself had been. Something seemed to flutter up from ehr face, like a bird escaping from her shuttered eyes above the oxygen mask. You stood there gaping at the wrinkled face, suddenly that of a corpse, and wondered where that fluttering, winged thing had disappeared to. (p.23/<Human acts>)



네가 유과를 받아 들고 히죽 웃으면 외할머니도 실눈으로 웃었다. 그 온화한 성품만큼이나 외할머니의 임종은 조용한 것이었다. 산소마스크를 쓴 채 눈을 감고 있던 외할머니의 얼굴에서 같은 무언가가 문득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주검이 된 주름진 얼굴을 보며, 그 어린 새 같은 것이 어디로 가버렸는지 몰라 너는 멍하게 서 있었다.



지금 상무관에 있는 사람들의 혼도 갑자기처럼 몸을 빠져나갔을까.(23쪽/<소년이 온다>)





'새'로 구현된 영혼이 죽은 사람의 몸에서 빠져나온다는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왜 하필이면 새일까. 종교에서 비롯된 말일까? 소설의 장면인데 마치 서사시의 한 장면 같다. 알고 보니 영혼으로 바뀌는 새의 이미지는 우리나라의 신라시대 토기에도 반영이 된 개념이었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의 변화로 새를 본 듯한 소년의 이미지가 인상적이다. 오늘 내 마음속을 파고든 단어, '새'와 '영혼'이다.



원서와 영문 번역본의 차이도 독특하다. 한국어 원서는 '1장 어린 새'라고 되어 있는 반면, 영문판은 'The Boy, 1980'으로 되어 있다. 상징물이 1장의 소제목이 되었지만 영문판은 그 장의 중심인물, 시선을 따라가는 사람에 주목한 번역가의 감상 기준을 알 수 있다. 그 나름 타당한 이유가 느껴져서 이질감보다는 동서양의 관점 차이가 묘한 매력으로 다가왔다.



독특한 사실이 또 하나 있다. 우연의 일치인지 고의적 장치인지는 모르나 이 내용이 나온 페이지는 모두 23쪽이다. 대개 원서와 번역서의 언어가 상이한 경우 쪽수가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좀 더 긴 내용으로 혹은 오히려 짧은 내용으로 번역되어 동일 내용이 서로 다른 양의 쪽수로 구성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죽음을 직접 목격한 적이 없다. 아버지의 마지막을 보지 못했고 3일장을 치르는 동안 고이 모셔진 시신을 한 번 보고 인사를 드렸을 뿐이다. 아버지도 새처럼 날아가셨을까. 내 영혼에도 새의 날갯짓이 꿈틀거리고 있을까. 작가는 이런 관념을 염두에 두고 서술했을까. 개인적 경험이 반영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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