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련소 가는 날-그날의 추억
아이가 마치 동자승처럼 제로에 가깝게 머리를 깎고 다음 날, 나는 아이의 뒤에 앉아서 가던 길의 장면이 가끔 스쳐 지나간다. 아빠와 아들, 두 사람은 다소 들뜬 기분으로 대화를 이어나갔고 나는 주로 들으며 추임새만 넣었다. 몇 시간이 걸리는 훈련소 길에 대화가 간간이 끊기는 때가 있었다. 어느 순간 아이가 메모지를 펼치더니 주문 외우듯 뭔가를 반복해서 읊어대기 시작했다.
"중얼중얼, 아이씨, 또 까먹었네. 중얼중얼... 잠깐만요. 아빠, 말하지 마요... 음,,, 음.
안 되겠다. 아빠는 운전하니까. 엄마, 엄마!"
"응? 어, 왜?"
나 또한 아이가 뭘 자꾸 종알대는지 궁금해 귀를 기울이던 찰나 아이가 느닷없이 나를 부르는 소리에 깜짝 놀랐다. 내 마음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였다. 그대로 안 그런 척 목소리를 최대한 평온하게 유지하며 대답했다.
"이거 보면서 내가 제대로 외우나 봐줘요. 틀리면 바로 말하지 말고 내가 말해달라고 하면 말해요. 아니다. 틀리면 우선 멈추게 하고. 기억 못 하면 우선 기다렸다가 정 모르면 말해줘요. 알았죠? 절대 먼저 말하면 안 돼요!"
"으, 응. 그래. 알았어. 아니, 이게 뭐야? 복, 무, 신, 조?"
"얼마 전 선배를 만났는데, 이거 다 외워야 한대요."
복무 신조라는 내용을 처음 보고 잠시 넋을 잃고 쳐다봤다. 메모지에 빼곡히 적혀있었다.
육군 복무신조服務信條(우리의 결의)
우리는 국가와 국민에 충성을 다하는 대한민국 육군이다.
하나.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며 조국 통일의 역군이 된다.
둘. 우리는 실전과 같은 훈련으로 지상전의 승리자가 된다.
셋. 우리는 법규를 준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한다.
넷. 우리는 명예와 신의를 지키며 전우애로 굳게 단결한다.
복무 신조를 암기하는 아이, 옆에서 따라 외우고 있는 안드레아, 모두 보지 못했던 모습으로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영화도 아니고, 80년대 민주화 물결이 몰아치던 시대도 아니고, 뭐라 할까 조지 오웰의 <1984>의 전체주의까지는 아니어도 뭔가 결연해 보였다. 진지한 모습이지만 속으로는 조금 무섭기도 하고 군대라는 곳이 다른 게 힘든 게 아니라 자유가 제한되어 같은 시간, 같은 일상을 보내야 하는 곳, 이런 강령 암기가 몇십 년이 지나도 필요한 곳이라는 게 실감 났다. 민간인이자 엄마인 나도 기분이 이럴진대 국가에 부름, 사명, 보호를 위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아이의 마음은 어떨까? 아이의 노력, 변화가 딱하면서도 기특하면서도 이런 복잡한 심정을 뭐라 설명할 수 없었다.
연습과 대화의 틈새를 타고 나는 재빨리 스마트폰으로 검색했고 과연 인터넷에 복무 신조가 여러 블로그와 검색엔진에 올라와 있었다. 아, 다 외워야 하는구나. 때로는 시대가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게 있었다. 복무 신조, 애국가 제창, 충성! 그리고 대한민국 청년들의 군 입대. 게다가 30년의 시간차를 두고 있는 아이의 아빠가 함께 기억을 되살려 외우고 있는 모습이 신기했다. 아빠는 추억에 잠기고 아이는 세밀한 단어가 헷갈린다고 불안해하며 연습을 무한 반복하고 있었다.
"넷, 우리는 명예와 신뢰를 지키며..."
"신뢰가 아니고 신의야."
"아이, C!"
"괜찮아, 훈련소 가기도 전에 이 정도 외운 게 어디야?"
분단이, 전쟁 중이라는 현실이 이런 건가 싶었다. 조연에서 주연이 된 기분. 그 주연이 그리 기쁘지만은 않은 기분. 같지는 않지만 나는 아이를 낳을 때를 떠올렸다. 아이와 만나는 건 좋지만 출산의 경험은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던 그때. 어떤 엄마는 그 기억을 잊고 또다시 아이를 낳고 싶어 하기도 한다는데 군대는 전혀 다른 개념의 경험인 것 같다. 아빠와 아이 모두 아무리 돈을 준다 해도 두 번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아들) "절대 못 가죠. 아빠는요?"
(아빠) "억을 준다 해도 노 땡큐!"
점점 긴장하는 아들을 보며 내 마음과는 반대로 의연한 척 말을 걸었다.
'자, 이제 다시 한번 외워보자. 그리고 틀리면 어때. 이만큼 연습했으면 처음부터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을 거야."
"끙~난 망했어! 안 외워져."
이 말을 한 지 어느새 두 달이 지났다. 아이의 걱정과 다짐, 우리의 믿음이 혼재했던 그날을 뒤로하고 이제 후반기 교육이 다 끝나가니 아이는 복무 신조는 얼추 외웠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