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할머니, 저 왔어요!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손주!”
“아이고, 그렇게. 어떻게 왔냐? 먼 길을. 방학이라 왔어?”
“그렇긴 한데, 어쩌나? 할머니, 저 내일 군대 가요.”
“잉? 뭐라고? 갑자기? 아이고! 이렇게 추운 겨울에? 감기 걸리면 어쩌려고? 아이고, 우리 손주…….”
군대 훈련소 입대 하루 전이었다. 아이는 군대 가기 전 외할머니께 꼭 인사드리겠다고 했다. 손주의 갑작스러운 소식에 깜짝 놀란 엄마가 걱정하자 남편은 괜찮다고, 더운 여름보다는 차라리 추운 겨울에 가는 게 더 낫다고 말씀드렸다. 점점 어두워지는 엄마의 표정을 보고 애써 밝게 대하는 아이도 속으로는 무척 떨리고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어떻게든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워야 했다.
“참, 엄마. 나 어렸을 때 해준 이야기 있잖아요. 아버지가 엄마랑 결혼하고 군대 갔는데 그곳에서 엄마 첫사랑을 만났다면서요. 군대 가는 손주한테 다시 말해줘요. 긴장이라도 풀게. 그 얘기는 엄마가 직접 해야 재미있을 것 같아.”
“아, 그거. 그게 말이지. 하도 오래되어서. 가만, 내가 꽃다운 나이에 꽃처럼 예쁜 시절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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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교인 그는 해병대 내무반을 돌고 있었다. 고된 일과를 끝내고 사병들은 저녁 식사 후 각자의 방식으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시 후면 취침 점호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내무반 신병 하나가 사진을 들여다보며 눈가가 촉촉해지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그는 신병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가족사진인가?”
“네, 제 아내입니다!”
“아, 결혼했나 보군. 사진을 한 번 봐도 되겠나?”
“네, 물론입니다!”
신병은 손에 들고 있던 사진 몇 장을 상사에게 바로 건넸다. 스물한 살이 되던 해 열아홉이던 아내를 만나 결혼한 그는 첫딸을 낳고 얼마 후 군대 영장을 받게 되었다. 단란한 가족사진을 건네받으며 미소 짓던 그는 사진 속 여인을 보고는 갑자기 얼굴이 굳어버렸다. 분명 그녀였다. 군대에 오기 전 자신이 살던 곳이자 부모님이 하숙을 치던 집에 머물던 그 소녀. 그는 군대 오기 전 알게 된 그녀를 떠올렸다.
***
맑고 순수한 표정의 그 소녀, 듣자 하니 사정이 유난히 딱했다. 전쟁이 터지자 공산당을 피해 어머니와 함께 무조건 피난길에 올랐다고 했다. 돈이 없어 표를 구하지 못했고 사정사정해서 남한으로 가는 기차 꼭대기 한편에 자리를 얻어 겨우 올라탔다. 남편도 없이 낯선 땅에 도착한 소녀의 어머니는 바느질 일을 구했지만 입에 풀칠하기도 버거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지금 하숙집 주인 덕분에 그럭저럭 지낼 수 있는 것만도 감사한다고 했다. 하숙집 아들인 그는 딱한 모녀의 처지를 들었고 처음에는 그냥 동정심이었지만 점점 애틋한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 무척 혼란스러웠다. 소녀가 자신과 마주쳐 얼굴을 붉힐 때면 귀엽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끔 하교하는 그녀를 에스코트하며 함께 집에 오기도 했는데 그런 자신이 마치 기사라도 된 기분이었다. 그녀도 자신을 그리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입대하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 그녀와 나는 오누이처럼 지내던 사이라 뭐라고 딱히 말할 게 없었다. 아니, 말할 수 없었다. 아무런 약속도 할 수 없었고 자신을 기다려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저 듬직한 친척 오빠처럼 무심하게 소식을 전할 수밖에. 그녀도 마침 곧 충청도에 있는 친척 집에 가게 되었다고 했다. 두 사람은 어차피 헤어질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