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사량(思量)의 흔적

by 애니마리아


2024년 음력설을 지내기 위해 온 가족이 네 할아버지, 할머니 댁에 가면서 기분이 이상했단다. 뭔가 허전하다고 해야 하나, 뭔가 아쉽다고 해야 하나. 말로 표현하기 애매한 기분이 계속되고 있단다. 네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떡국을 보아도 네 생각이 나고 네가 좋아하는 비빔밥을 먹어도 네 생각이 났다. 세배를 하며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순간에도, 조카들이 세뱃돈을 받으며 싱글벙글한 모습에 미소가 지어지면서도 네가 있으면 더 신나 했을 것 같은 기분. 물건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너를 어디선가 잊고 온 기분, 그곳에 어디 있는지도 알지만 당분간은 다시 데리러 갈 수 없는 기분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지.



집으로 돌아오기 전 네 자취방에 들렀단다. 급히 군 입대를 하느라 짐도 다 정리하지 못하고 청소도 제대로 못하고 간 네 흔적을 마무리하려고 네 아빠는 한참을 운전했었지. 너를 잃은 방은 전에 그렇게 좁아 보였는데 네가 없는 방은 텅 빈 황량함으로 멀고 낯설었지. 청소를 해야 하는 상황의 한숨보다 네가 남긴 수많은 물건에 더 시선이 갔던 때가 다시 떠오른다. 침대 구석에 박혀 있는 옷가지와 네가 그동안 모은 기념품들, 큰 덩치에 작은 장난감과 수집품. 특히 눈에 띄는 마드리드 Madrid 술잔, 일본 술잔, 올망졸망하게 서 있는 미니 장난감들.



네 짐을 잔뜩 싣고 집에 와서도 네가 생각나는 물건은 여전히 나를 응시하고 있더라. 우연히 책 속에 꽂혀있던 크리스마스실, 2022년도 것이지만 멋진 손흥민 선수의 모습으로 꾸며져 있어 축구를 좋아하는 네가 생각났단다. 그 옆에 있는 각종 스페인어 책, 읽지는 못해도 너와 소통하고 싶어서 산 스페인어 판, <어린 왕자>.



밖을 나가도 너의 모습을 그리게 된다. 식당에 가서 돈가스나, 샤부샤부, 시원한 묵 요리, 초밥 따위의 음식을 볼 때마다 네가 좋아하는 음식이라며 함께 먹지 못하는 상황이 서글퍼지는 순간도 있었거든. 명절 기간 들렀던 식당에서 맞은편에 군인 세 명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는 아직 훈련을 받느라 휴가는 아직 꿈도 못 꾸는 상황을 깨달았단다. 그뿐일까? 신문 헤드라인에 난 군인들의 순찰 사진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리고 무심코 지나쳤을 북한에 대한 뉴스가 유난히 신경 쓰이는 기분 또한 네가 군대에 가고 난 후부터 생겨난 변화였어.



주말에 거실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단다. 검색을 하다 보니 SF가 눈에 들어와 '스타트랙-다크니스'를 보았어. 예상대로 아빠는 잠이 들고, 나는 처음에는 신나게 보았지만 악당과 주인공이 싸우는 장면에도 화려한 우주선의 순간 이동 장면에도 그리 신나지 않더라고. 너와 가끔 보던 주말의 영화가 생각나서 말이지. 축구와 영화는 우리 사이에 그나마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려 주는 공통 화제이자 윤활유였기 때문일 거야.



사랑한다는 말은 누군가를 오래 생각하고 그리워하는 것이라는 말이 떠올랐어. 전에는 말이 비슷하니 그러려니 했지만 이제야 이 말이 절실하게 와닿는구나. 누군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보고 싶어 하고 배려하고 싶고 마음속에 한참 담아둔다는 의미라는 것을 말이지.



그렇다고 마냥 슬픈 것은 아니란다. 걱정하지 말렴. 그저 건강하게 너무 아프지 않게 잘 견디고, 잘 지내고 그곳에서도 행복과 기쁨, 좋은 관계를 이루며 살아가길 바라는 엄마의 마음은 변함없으니. 너도, 나도 또 하나의 성장하는 기회, 서로를 생각하며 찬찬히 되돌아보는 시기로 여기고 사랑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라.



사량(思量) 한다,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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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와 손흥민 크리스마스실을 보니 네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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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에 난 군인의 사진, 지나가는 군인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나 자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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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남기고 간 마드리드 술잔과 일본 라멘 용기가 미소 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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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에 영화 검색만 해도 너와 소파에서 보며 이야기를 나누던 순간이 떠오른다.


* '사랑하다'의 어원


사량(思量): 생각하여 헤아림(국어사전)


불교 용어인 사량(思量)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그 근거로 우리말로 쓴 최초의 '용비어천가(세종 29년 1447년)'에서 '생각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영어 love는 어떨까? 문화권이나 분야(종교, 언어)에 따라 다르겠지만 검색에서 종종 나타나는 설명에는 '기뻐하다'라는 뜻의 lubere에서 왔다는 말과 여성이 음식을 하고 남은 것을 남성이 그 정성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left-over venison eater)의 두문자를 이은 lover라고 주장하는 내용이 특히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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