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시점에서
그는 소녀에게 말했다.
“아, 잘 됐네. 나중에라도 서울에 오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해. 지금은 나도 군대를 가야 하니 힘들지만 3년 후 제대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둘은 밝은 표정으로 작별 인사를 했지만 마냥 웃을 수만은 없었다. 그도 자신의 마음이 한편으로 왜 이리 허전한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수많은 하숙생 중에 하나였고 자신은 그저 나라의 부름에 응해야 하는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사람. 차마 기다려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끝은커녕 과정도 논할 수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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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부끄러운 듯 사진을 다시 되돌려 받는 신병의 얼굴을 쳐다보며 그는 깨달았다. 그녀가 거처를 옮기고 난지 얼마 안 되어 결혼했고 그녀의 남편이 해병대에 와서 자기 부하가 된 사실을.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앞으로 이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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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정말이에요, 할머니? 그래서 어떻게 되었어요? 두 분이 막 싸우고 그랬어요? 아니, 할머니 첫사랑이 화가 나서 외할아버지 막 구박하고 그랬나?”
“구박은 무슨! 나중에 들어보니까 그 사람이 네 외할아버지한테 엄청 잘해줬다고 하더라고. 군대 오기 전 자기 집에서 하숙한 여학생의 남편을 만나게 돼서 반갑다고 했대. 오누이처럼 지냈던 여학생이 벌써 결혼해 엄마가 된 것도 신기하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면서. 틈만 나면 간식도 챙겨주고 자기가 신던 군화도 주면서 그렇게 외할아버지를 챙겨줬다고 하더라고.”
“아, 그렇구나. 그런데 할머니, 할머니도 그분 좋아했어요? 둘이 정말 안 사귀었냐고요?”
“사귀는 게 다 뭐야? 지금이랑 달라서 그때는 손 한 번 못 잡아 보고 데이트 한 번 못 했어. 그러다 그 사람이 갑자기 군대 간다더라. 뭐, 마음속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그러면 그 아저씨가 외할머니 좋아한 줄은 어떻게 알았어요? 말도 제대로 안 했으면서.”
“그런 걸 꼭 말로 해야 아냐? 그저 눈빛만 봐도 알지. 어휴. 그 사람이 나한테 기다려 줄 수 있냐고 한마디만 했어도 기다렸지. 하지만 그때는 부끄러워서 말도 못 했어. 서로.”
“에이, 할머니. 그때 그 아저씨 기다렸으면 외할아버지랑 결혼 못 했을 테고 엄마도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고 특히 나처럼 이렇게 예쁜 손주도 못 봤을 거예요. 외할아버지랑 결혼하길 잘했지, 할머니!”
“그런가? 하하하.”
아이의 넉살 좋은 대꾸에 우리는 다 같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의 그 충격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가 그분을 만났을 때의 나이 때 처음 들은 이야기는 다시 들어도 신기했다. 과연 사실일까 싶다가도 때로는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난다고 하지 않는가? 사람의 기억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도 있어서 타인에게 전달하는 과정에서 다소 변형되고 과장될 수는 있다. 게다가 자신의 운명, 미래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주어진 인생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게 된다.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게 된 엄마는 아버지를 만나 결혼했고 그 덕분에 나는 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참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엄마의 첫사랑 이야기를 들은 지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났다. 어여쁜 손주로서 외할머니를 웃게 한 아이의 마음을 떠올릴 때면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가뜩이나 힘들고 낯선 군대에 가서 아내의 첫사랑을 만났을 때 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 남자 또한 고백도 하지 못한 첫사랑의 남편을 마주치고 난 후 진짜 마음은 어땠을까? 어떤 진실이 존재했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당시 군대에서 그분을 존중하며 무사히 제대한 아버지처럼 내 아이도 좋은 동기와 상사를 만나 잘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파란만장한 사건은 없어도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거듭나는 하루하루가 아이에게는 드라마이고 기적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