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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제 언어의 세계로 들어갈 열쇠를 가졌으므로 하루라도 빨리 그것을 써서 열심히 배우고 싶었다. 들을 수 있는 아이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말을 배우게 마련이다. 그들은 마치 날아다니며 주워 담듯이 너무도 쉽고 재미있게 다른 사람들의 입술에서 떨어져 나오는 낱말을 잡아챈다. 그러나 들을 수 없는 아이들은 어떤가. 힘겹게 때로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밟아가며 올가미에 낱말이 걸려들게 해야 한다."
<사흘만 볼 수 있다면> 헬렌 켈러/59쪽 중에서
사람들은 말한다. '엄마'라는 말을 시작하는 아기는 아마 이 단어를 주변에서 수백 번 혹은 수천 번 들었을 것이라고. 처음에 이 말을 들었을 때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그렇게 많이 들어야 하나. 말이 트이는 과정, 즉 언어 습득을 위해 인간은 반드시 지난한 반복의 과정을 겪어야만 하는가.
수백 번이라니! 수천 번이라니! 너무 많다고 생각했다. 외국어인 경우 횟수가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재능과 노력에 따라 다르고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결국 목표점에 다다를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 길이 귀찮고 때로는 힘들게 느껴질 뿐.
하지만 생각해 보았는가. 당연히 여겨지는 이 상식 같은 현상이 누군가에게는 결코 누리기 힘든 사치일 수도 있다는 것을.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피부의 작은 모공이 아예 막힌 것처럼 그 누군가에게는 땀을 흘리기조차 힘들다는 것을. 당연한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아무도 당연하다고 알려주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런 희망을 가질 수 없다면. 열쇠는커녕 보이지 않는 문의 존재조차 알 수 없다면.
우리는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다. 헬렌 켈러는 들을 수 없고 볼 수도 없었다. 타인을 모방하며 언어를 배우고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은 시각과 청각이 없이는 그저 나머지 감각(촉각, 미각, 통각)으로 생존하는 동물과 다름없을 테니.
나는 불의의 사고로 오른팔 사용이 힘든 상태다. 다수에게 너무 당연한 생활의 움직임이 내게 허락되지 않아 문득 화가 치밀어 오르기도 하고 종종 답답함에 한숨이 나오기도 한다. 새벽의 뒤숭숭한 꿈자리, 눈을 뜨자마자 묵직하게 밀려오는 통증에 나의 현실을 자각한다. 1분이면 될 화장실에서의 일이 세 배 이상 걸리며 어찌어찌 옷을 입고 몸을 이리저리 비꼬며 겨우 손을 씻고 나온다. 한 손으로는 물병을 드는 것조차 힘들어 포기하고 식탁 한편에 놓인 초코파이 하나를 꺼내 놓는다. 옆에 있는 남은 빵과 함께. 이건 아니다 싶어 냉장고 문을 역시 낑낑대며 연 후 남편이 좋아하는 곶감 하나를 꺼낸다. 옆에 있던 맥반석 달걀 하나도 추가해서. 출근을 앞둔 남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있는 음식(사실 간식거리에 불과하지만)을 찾아 아침으로 놓아줄 뿐이다.
언어의 세계로 들어갈 열쇠를 찾기 위해 피나는 노력과 고통을 감내한 헬렌 켈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나는 오늘도 노력하고자 한다. 정상인의 삶이라는 문 너머에 살다가 내쳐진 상황이지만 나는 믿고 있다. 시간에 대한 인내와 꾸준한 노력, 열쇠를 찾고자 하는 나의 의지로 문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지금은 그 문이 부서져버린 듯 보이지만 언젠가 고칠 수 있다는 것을. 삐거덕거릴지언정 오래된 열쇠를 다시 끼워 언어의 세계로 다시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한없이 느린 삶이 허망해 보이지만 나무늘보도 삶의 의지가 있어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