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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지 않으니

by 애니마리아

보호대 착용이 8주가 다 돼간다. 2주 전부터 재활치료를 병행하지만 아직 팔은 양철 나무꾼처럼 삐거덕거리며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그보다 더 못하다. 기름을 칠하면 나아지듯 나도 물리치료를 받으면 마법처럼 이전의 팔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하지만...

사고 전에는 전날 일찍 잠들거나 요의를 느끼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 새벽에 깨곤 했다. 요즈음은 별다른 이유 없이 혹은 악몽 같은 개꿈을 꾸다가 잠에서 깨어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수술 부위를 따라 욱신거리는 통증이 나의 현실을 일깨워 준다. 그래도 바로 진통제에 의존하고 싶지는 않다.


'좀 더 참아보자.'

더딘 속도에 답답함을 호소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생각보다 늦어지는 회복 속도와 불편해진 일상에 대한 내 욕심과 불평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리석은 소인이 된다. 그러니 당연함을 되돌아보고 똑같은 일상에 감사해야 하는지 돌아보려 한다.


당연함은 감사다. 식탁 앞에 앉아 젓가락질을 하고 저 멀리 있는 반찬을 집어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온전하고 건강한 신체를 쓸 수 있다는 축복이다. 내게 닥친 사고는 불행과 행복의 양면이 있어 나는 어색하고 대화가 적었던 둘째 아이의 보살핌도 받았다. 그렇게 하기 싫어하던 설거지를 하고 내가 잠시 외출하고 돌아오면 가끔 옷을 벗는 것도 도와주었다.


당연함은 사랑이다. 두 달이 지나도록 아직 팔이 올라가지 않아 머리를 감을 수 없다. 날씨까지 점점 포근해지는 바람에 머리 감은 지 이틀만 지나도 엄청 가려움에 시달린다. 남편은 업무 상 회식 자리가 많고 상사 및 팀 직원을 챙겨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 때문에 늘 중간에 나오곤 한다. 회식이나 야근을 끝까지 피할 수 없을 때는 밤 10시에 집에 오더라도 팔을 걷어붙이고 아내의 세발을 위해 애쓴다. 언감생심 한두 번도 아니고 옷조차 한 손으로 벗을 수도 없다. 혹여 각도가 조금만 벗어나도 전기가 흐리고 동시에 팔이 다시 부러지는 듯한 통증이 오기 때문이다. 게다가 팔에 박은 철심이 삐져나오기라도 하면 재수술을 해야 한다는 무서운 말은 어찌나 기억이 잘 나는지.


당연함은 꿈을 향한 은총이다. 그토록 좋아하는 책도, 글쓰기도, 공부도 한동안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손을 까딱할 수 있는 수준은 되어서 평소 십 분 걸릴 일이 한 시간 걸리고 한 시간 걸리던 일이 세 시간 걸리지만 그래도 감사한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게 의미 있고 중요한 일을 그나마 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엄청난 은총이니까.


당연함은 잊었던 인간애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줄 수 있는 배려와 연민, 공감은 얼마나 소중한가. 또래 지인보다 잔병이 많은 나는 아프지 않은 곳이 거의 없을 정도다.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아픈 곳, 기존의 병치레 등 말하기가 민망하고 미안할 정도다. 좋은 말도 자꾸 들으면 듣기 싫다는데 안 좋은 소식을 듣는 건 오죽하겠는가. 가족도 힘들 수 있는 일인데 그래도 전화해 주고, 위로해 주며 마음을 전하는 분들의 배려를 느낀다. 사랑과 같은 우정이다. 희생과 같은 보살핌이다.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감사하려고 한다. 기도 중에, 화살기도를 하며, 일기장에, 마음으로.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혹은 지나쳤던 나의 무심함을 반성한다. 가끔 매일 똑같은 일상과 정상적인 루틴에 감사를 적는 게 무슨 의미일까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 당연한 일상을 하지 못하게 되니 쓰고 또 쓰더라도 감사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오늘의 당연함이 내일도 당연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허상에 불과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인스타그램의 인친 몇 분마저 안타까움을 전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사실 아무런 연고도, 의무도 없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시간을 들여 누군가의 힘이 된다는 게 쉬운가.

그러니 당연하다는 것은 늘 감사하며 축복이고 사랑이자 우정임을 기억해야 한다. 나 또한 누군가의 고통을 알게 되면 조금이라도 관심과 힘을 보탤 수 있다는 가치를 통감한다.


오늘도 눈을 뜨는 순간 감사한다. 어제와 같아도 감사한다. 숙면을 취할 수 있어 감사하고 햇빛을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한다. 먼지는 많지만 봄바람을 맞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한다. 팔은 다쳤지만 머리나 다리가 아니어서 감사하고 두통이 있지만 약을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빨리 진도를 나갈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이라도 공부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한 줄이라도 글을 쓸 수 있어서 감사하고 진실한 글벗과 솔직한 의견을 나눌 수 있어서 감사하다. 나와 다른 의견을 만나고 접해도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서 감사하다. 아이에게 츤데레 같은 관심을 받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학교에 잘 다니는 것만도 감사하다.

무엇보다 고통을 통해서 잊었던 행복을 깨달을 수 있어서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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