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의 기원

<사흘만 볼 수 있다면>

by 애니마리아


아기 때 열병을 앓아 시력과 청력을 잃고 천방지축 문제 아이였던 헬렌 켈러. 부모도 어쩌지 못하는 그녀가 설리번 선생님을 만나 물 water이라는 단어를 손으로 체험하고 난 후 훌륭한 사람이 되어 다른 장애인들을 위해 봉사한 위인. 내가 배우고 기억하는 헬렌 켈러의 삶은 딱 거기까지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하다'는 말처럼 이는 단순히 헬렌 켈러의 일부분의 이야기만 아는 것이며 앞뒤 맥락이 빠진 요약본, 그것도 약간이 과장과 편집이 들어간 동화 같은 면이 없지 않다.



헬렌 켈러는 1880년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출생했다. 19개월 만에 열병을 앓고 영원히 시력과 청력을 잃고 말았다. 목소리에 아무 이상이 없어도 듣지 못하니 당연히 정확한 발음으로 어휘 다운 언어를 말할 수도 없었다. 2가지의 감각 장애가 3가지의 신체장애로 이어졌고 이는 어린아이에게 치명적인 정신적 트라우마와 고통을 심어 주었다. 이 책을 펼치면 그녀에 대해 알지 못했던 사실을 직면하게 된다. 우선 헌사 부분에서 그녀가 언급한 사람을 보자.







"나 헬렌 켈러는,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가르치고 대서양에서부터 로키산맥에 이르기까지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의 귀에 참된 말씀이 들리도록 인도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5쪽/<사흘만 볼 수 있다면> 중에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1922)은 흔히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취득하고 기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헬렌 켈러 자서전을 읽다 보면 그가 과학자뿐만 아니라 청각 연구 및 청각 장애 교육에 관심을 두고 수화 교육에 연구와 노력을 쏟아부은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헬렌 켈러와의 인연은 어쩌면 필연적이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을 텐데 특별히 헌사에 언급한 것만 보아도 그가 헬렌 켈러에게 얼마다 큰 영향을 끼쳤는지 알 수 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헬렌 켈러 자서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다.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으며 특이하게도 각기 쓰인 시기가 다르다. 1부 ‘내가 살아온 이야기(The Story of my life)’는 1903년 그녀가 22살 때쯤 쓴 것이고 2부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Three days to see)’는 그로부터 약 30년 후인 53세(1933)에 발표된 것이기 때문이다.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1부는 그야말로 일반적인 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른용 전기라 할 수 있을 만큼 세밀하고 촘촘한 사건의 연속이다. 아기의 성장 속도가 너무 빨라 그 변화의 폭이 큰 것처럼 독자는 헬렌 켈러의 기억의 시작 무렵부터 폭발한 삶의 열차를 타고 함께 과거 여행을 간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특히 의외로 솔직한 에피소드가 초반을 끌어가는 힘이 되기도 한다. 동생 밀드레드의 탄생, 질투심으로 요람을 흔들어 아기를 거의 죽일 뻔한 헬렌의 모습. '낸시'라는 애착 인형과의 우정과 사건, 설리번 선생님과 만나기도 전에 알렉산더 그레이엄 박사와 만난 이야기, 독서, 글쓰기, 외국어 학습(독일어, 프랑스어 등), 우여곡절 끝에 일반인과 똑같은 시험공부로 하버드대에 입학한 과정, 마크 트웨인을 비롯한 유명인, 지식인과의 교류 등 차고 넘칠 듯한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단순히 사건만 나열하는 게 아니라 그녀의 생각과 어리석음, 깨달음, 지혜가 담겨 있어 자주 멈추고 생각하며 곱씹는 독서가 아니면 도저히 소화하기 힘들 정도의 내용이 켜켜이 쌓여 있다.



2부는 소위 지천명이 넘은 시기에 쓴 에세이인 만큼 더욱 성숙한 감성과 철학이 마치 인류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담겨 있다. 깊은 성찰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둠이 내릴 때, 이제 다시는 빛이 비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면 이 소중한 사흘을 어떻게 살아가시겠습니까?"

264~265쪽/<사흘만 볼 수 있다면>







정상인이지만 바라보지 못한 날카로운 통찰을 따뜻한 감성으로 녹여내었다. 읽고 나면 20세기 우수한 에세이로 평가받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느 순간 장애인이 아니라 인간의 한계를 이기고 또 극복해 낸 위대한 인간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과연 기적은 어떻게 일어나는지, 어떤 노력과 신념으로, 우리 안에서 꽃 피우는지 실감케 한다.



마지막에는 연보가 있어 시기별로 출생과 사망까지의 주요 사건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간단한 소개만 있을 뿐이라 아쉬움을 느낄 독자가 있을 수 있다. 놀랍게도 한국에 방문한 기록도 나와 있으니 책을 읽은 후 검색을 통해 좀 더 알아가는 재미도 누리길 바란다. 그녀도 한 인간이기에 지금의 관점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알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약점과 실수를 통해 그녀가 신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한 인간으로서 희로애락을 다 겪었음을, 하지만 정말 하루하루 치열하게 살고 생각하고 인생을 즐기려 했음을 알 수 있을 테니.



연보의 마지막을 보면 그녀가 이 책을 발간하고 거의 40년을 더 산 것을 알 수 있다. 90세가 다 되도록 또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고 해냈을까. 학자로서, 언어 천재이자 노력파로서 그녀와 같은 장애인은 물론, 여성, 사회적 약자를 위한 목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교과서나 동화 같은 아동용 책에서 피상적인 내용만 읽었다면 이 책은 헬렌 켈러라는 한 인간의 내면과 삶의 기록으로써 독자에게 뜻깊은 영감을 줄 것이다.







"내가 나이아가라 폭포가 준 놀라움과 아름다움에 감동받았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긴다.

......

보았으면 또 들었으면 다 안 것인가, 다 설명한 것인가. 사랑이 무엇이며 종교란 또 무엇이고 또 선함이란 어떤 것인지 설명하는 것이 어려운 만큼이나 나이아가라, 이 대자연의 스스로 그러함을 설명하기 어려운 건 피차 마찬가지 아닐까."

136~137쪽 중에서/<사흘만 볼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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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흘만 볼 수 있다면 저자헬렌 켈러출판사우발매 2018.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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