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도 달린다>
'달팽이도 달린다'라니! 달팽이는 달릴 수 있는 다리도 없거니와 아무리 빨리 기어가 보았자 애벌레나 지렁이보다도 느릴 것 같은데. 상식을 벗어난 듯한 제목이 허를 찌르며 깊은 인상을 새기며 궁금증을 자아낸다. 거대하지만 밝고 귀여운 외모의 달팽이와 그 위에서 개성 강한 아이들의 모습도 예비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촉매제가 된다.
달팽이는 느림의 대명사다. 약한 존재를 대표하기도 한다. 노래 가사 '달팽이(1995, 패닉)'처럼 '아무도 못 봤지만 기억을 더듬어 영원히 가겠다'는 끈기에 대한 이야기일까. 밝고 경쾌한 표지 이미지는 왠지 이런 기존의 장엄한 메시지와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저자 황지영은 동화와 청소년 소설을 쓰는 작가로 동화 <도개울이 어때서!>, <루리의 우주> 등과 청소년 소설 <블랙박스:세상에서 너를 지우려면>등 다수의 작품을 선보였다. 웅진주니어 문학상과 마해송문학상을 받았다. 일러스트레이터 최민지는 그램책 작가로 <문어 목욕탕>, <코끼리 미용실>을 을 쓰고 그렸다. 본 작품에서 내용에 꼭 맞는 옷처럼 잘 어울리는 캐릭터와 그림으로 보는 즐거움을 더하는 데에 일조했다.
창작 동화집인 '달팽이도 달린다'는 다섯 명의 주인공과 그들과 엮여 있는 친구 혹은 가족과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총 다섯 편의 이야기가 독립적 주제를 담은 옴니버스처럼 존재하면서 다양하고 개성 강한 캐릭터와 갈등의 형성과 전개를 보여준다.
달팽이도 달린다
땡땡 님을 초대합니다
잠바를 입고
복어의 집
최고의 좀비
내용과 주제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이야기에 드러난 특징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작가가 그 속에서 살다가 직접 들려주듯, 목격한 것과 생각을 드러낸 사실적인 표현과 대화체가 나도 모르게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전체적인 흐름뿐만 아니라 세세한 내용이 현실 고증을 꼼꼼하게 조사하고 살펴본 후 펼쳐놓은 작품이 생명을 얻어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교실 컴퓨터를 사용하는 장면(39쪽/땡땡 님을 초대합니다)은 요즘 초등학교의 교실 환경을 보여주고 '잠바를 입고' 편에서는 촬영 현장의 생생한 모습이 인트로로 나와 강렬한 단편의 매력을 보여주었다.
소설의 경우 선악 구조를 이루는 캐릭터가 주는 긴장감을 접하기 쉽지만 극단적인 경우나 사건에 치중하다 보면 독자와의 거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정말 우리 가족, 친구, 이웃, 학교, 동네에서 만날 법한 현실적인 인물상을 보여준다. 무조건 약자나 소외된 사람을 주목하며 억지로 동정심을 끄집어내지 않아서 좋았다. 자존심 때문에 자신을 포장하고 그것을 알아챈 친구와 갈등은 말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상처가 된다. 하지만 갈등의 핵심에 이른 순간 서로가 털어놓는 솔직함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과정에서 변화가 일어난다.
"난 그래도 달팽이 좋던데. 먹이 먹는 소리도 좋고, 패각 무늬도 예쁘고, 더듬이 더듬거리면서 기어가는 것도 귀엽고. 기어갈 때 발 보면 꼭 파도가 일렁이는 것 같아. 넌 달팽이랑 안 맞나 보네. 힘들겠다."
26쪽/<달팽이도 달린다> 중에서
중요한 것은 달팽이가 아니라 달팽이를 바라보는 아이의 시선이다. 같은 대상을 대하면서 한 명은 소스라치게 징그러움을 느끼기도 하고 다른 한 명은 그저 모든 게 귀엽기만 하다. 하지만 친구의 '힘들겠다'는 말은 달팽이를 두고 한 말인지 달팽이를 보면 힘들어하는 자신을 향한 말인지 헷갈려하면서도 주인공의 의식을 바꾸기 충분했다. 이름을 주고 관심을 주고, 보살피는 노력으로 아이는 한 걸음 성장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간다.
다섯 개의 이야기는 내용적으로 서로 연결점은 없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공통점이자 재미를 느끼게 되는 요소도 있다. 바로 일러스트다. 달팽이는 첫 번째 이야기의 중요 소재로 등장하지만 나머지 독립된 이야기가 시작하는 표지에 늘 등장한다. 책표지에 나오는 아이들의 일치 여부 등을 찾아보면서 비교해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 놀이 같은 장치가 배치되어 이 책을 더욱 사랑스럽게 만드는 듯하다.
이 책의 작은 이야기들은 한결같이 관심에서 시작해서 친절을 통해 변화가 일어났냐는 공통점이 있다. 주인공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친절을 베푼 가족과 친구가 있었기에 주인공은 행복한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문제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긍정정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징그러운 달팽이가 사랑스러운 반려 달팽이가 된 건 달팽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 애환에 공감한 친구 덕분이었다. 고지식하고 별난 아이의 꿈이 이루어진 건 그 친구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 걱정에서 나온 진심 덕분이었다. 멋진 연기를 펼칠 수 있었던 건 경험에서 우러나온 친구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용기의 힘이었다. 희귀한 물고기를 집으로 보낼 수 있었던 건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친절의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최고의 좀비가 될 수 있었던 건 관심을 두고 친절을 실천한 누군가와 긍정적인 마음으로 세상과 어울리며 삐딱함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이야기 제목이 단편집 전체의 제목이 되었지만 마지막 이야기는 그 어떤 이야기보다 임팩트가 컸다. 읽다 보면 설명이 앞뒤로 설명이 빠진 듯 뭔가 매끄럽지 않거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감지될 때가 있다. 가령 주인공 미주를 향한 주변의 시선과 미주의 반응이다.
"지나가던 어른들이 미주 다리를 힐끔거렸다. 이 동네 사람들도 나한테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리겠네. "
119쪽
찝찝한 기분으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헉' 하는 깨달음에 온갖 수수께끼가 풀리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의문이 들었던 부분은 물론 별생각 없이 그냥 지나쳤던 부분까지 왜 그런 행동과 말을 했는지 이해하게 되는 신비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