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처럼 살 수 있다면

<작고 아름다운 나태주의 동시 수업>

by 애니마리아


시의 종류는 기준에 따라 여러 이름으로 불린다. 서정시, 서사시, 극시는 내용을 기준으로, 운문시, 자유시, 산문시는 형식에 따른 분류이다. 평범한 대중에 속하는 한 사람으로서 마음과 정서를 자유로이 표현하는 서정시와 자유시가 가장 친근한 시지 않을까 싶다. 동시는 말 그대로 '어린이를 위한 시'이지만 미성숙한 이미지나 변방의 한 시로 치부하기에는 그 범위가 넓다는 것을 실감했다. 모든 어른은 어린이였으니까.



어린이를 거치지 않은 어른은 없듯 동시의 영향을 받지 않고 성장하는 어른이 있을까. 우리는 알게 모르게 동시를 부르고 동시를 듣고 동시를 우리 마음속에 씨앗으로 꼭꼭 숨겨두었다. 씨앗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나는 수많은 동시 속에서 노래를 기억했고 인생을 돌아보았고 기쁨과 슬픔, 아픔과 성장을 겪었다.



이 동시집에는 운율감이 살아있는 동시 중에 동시를 엄선해 실렸지만 어른을 위한 산문시가 실려 있기도 하다. 동시 같은 어른 시, 어른 시 같은 동심의 시라고나 할까.



숨이 넘어갈 듯 긴 시이지만 긴 호흡을 한 번 한 후 여유 있게 한 줄 한 줄 읽어가다 보면 사과 하나에도 이처럼 긴 역사와 의미가 담겨있는 것을 발견하고 감탄하게 된다. 사과 속에 우주가 있고 수많은 노력과 열정이, 사랑이 있었다. 특히 마지막 그런 위대한 에너지가 깃든 '사과를 먹는다'의 대단원을 감지한 순간 또 하나의 시행이 예상치 못한 충격을 선사한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사과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일부를 먹는다


사과꽃에 눈부시던 햇살을 먹는다


사과를 더 푸르게 하던 장맛비를 먹는다


사과를 흔들던 소슬바람을 먹는다


사과나무를 감싸던 눈송이를 먹는다


사과 위를 지나던 벌레의 기억을 먹는다


사과나무에서 울던 새소리를 먹는다


사과나무 잎새를 먹는다


사과를 가꾼 사람의 땀방울을 먹는다


사과를 연구한 식물학자의 지식을 먹는다


사과나무집 딸이 바라보던 하늘을 먹는다


사과에 수액을 공급하던 사과나무 가지를 먹는다


사과나무의 세월, 사과나무 나이테를 먹는다


사과를 지탱해 온 사과나무 뿌리를 먹는다


사과의 씨앗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자양분 흙을 먹는다


사과나무의 흙을 붙잡고 있는 지구의 중력을 먹는다


사과나무가 존재할 수 있게 한 우주를 먹는다


흙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다


흑에서 멀리 도망쳐보려다


흙으로 돌아가고마는


사과를 먹는다


사과가 나를 먹는다




함민복, <사과를 먹으며> 중에서







문장 자체로만 보면 이게 무슨 비유이지?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조금만 여유를 갖고 앞선 행을 몇 개 다시 읽어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도니다. 흑으로 빚어진 사과를 먹는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 아무리 도망치려 해도, 가루가 되어 흩날린다 해도, 바다에 뿌려진다 해도, 서서히 그 바닥을 향해, 흙을 향해 가라앉는다. 그러고 나서는 사과나무와 같은 또 다른 생명체의 자양분이 된다. 순환의 역사는 그렇게 이루어진다.



동시 수업을 여는 글에서 나와있듯 이 책 안의 동시들은 모두 나태주 시인의 행복한 탐색으로 선택되었고 그분의 딸이자 평론가인 나민애 님의 감상으로 이루어졌다. 시를 읽은 일은 행복한 일이라고 운을 뗀 시인의 말과 동시처럼 살 수 있다면 그곳이 천국이라며 딱 동시만큼 살고 싶다는 따님의 소망이 차가운 삶의 온도를 높여준다.



불안과 혼돈의 시대에, 희망의 불꽃을 계속 피우며 살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아이와 함께 읽으며 노래를 부르는 것도(엄마야 누나야/김소월 40쪽) 좋고 시 한 편을 읽으며 필사를 해도 좋다. 단순히 추억 팔이가 아닌 삶의 근원을 떠올리고 의미 있게,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영감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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