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빛을 듣고 소리를 보는 순간

by 애니마리아


여자는 말할 수 없지만 볼 수 있다. 남자는 볼 수 없지만 말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서로 다른 아픔과 엇갈림으로 만나 죽은 언어로 연결되고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하려는 두 남녀의 이야기이다.



이들의 언어는 서로 달라 소통할 수가 없었다. 평행우주에 사는 서로 다른 존재처럼 평행선을 그으며 나갈 뿐이었다. 그들의 인생도, 경험도, 아픔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희랍어 시간>은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작별하지 않는다> 이후 읽은 한강의 네 번째 책이다. <채식주의자>의 강렬하고 독특한 스타일에 마치 뜨거운 물에 데어 엄두를 못 냈던 작가님의 작품을 하나하나 따라가고 있다. 천천히 나만의 속도로 되새기며 공통점을 발견하고 정성스럽게 박힌 언어를 끄집어 살펴보는 즐거움이 있다. 아직도 어렵지만 그런 나의 마음에 작가님이 엷은 미소를 띠며 괜찮다고, 당연하다고, 어려우면 잠시 쉬었다가 다시 한번 펼쳐보라고 말을 건네는 것 같다.



<채식주의자>에 혼란스럽고 <소년이 온다>에 분노했으며 <작별하지 않는다>에 가슴이 먹먹했다. 한강 님 스타일에 익숙해져서인지 문학에 조금 눈을 떠서인지 모르겠으나 <희랍어 시간>은 앞의 세 작품보다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읽을 수 있었다. 심지어 함께 읽는 다른 작품과의 연결점을 생각하며 파고드는 몰입을 경험하기도 했다. 낯선 어휘의 뜻을 찾아보기도 하고 좀 더 조사해 보기도 하면서 새로운 흥밋거리를 발견하며 메모하기도 하였다. 직접적으로 이런 책, 이런 작가를 탐험해 보라는 말 없이도 독자 스스로 알아보고 싶게 하는 문구가 숨어있는 것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로 시작하는 보르헤스 이야기를 접했을 때의 충격이 떠오른다. 차례 부분을 읽고 1장을 펼치자마자 나오는 낯선 내용은 가뜩이나 제목이 주는 서먹함에 더욱 두꺼운 시멘트를 얹는 듯한 심정이 기억난다.



'갑자기 칼? 보르헤스는 누구지? 아, 이 소설도 읽기가 쉽지 않겠구나. 나중에 읽을까? 노벨상 작가의 통찰력을 이해하기에 아직 멀었나, 절망, 절망.'



보르헤스를 검색하고 그의 생애와 기구한 운명을 알고 나서도 베토벤 못지않은 위대한 예술가에 빠져들고 나서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작가가 왜 그의 이야기를 초반에 넣었는지. 하지만 <희랍어 시간>을 읽으면 읽을수록 두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를 알아챌수록 보르헤스가 끼치는 영향과 예술성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었다. 작가님에게 이 작품을 구상하게 된 영감이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하게 되었으니까.



서론이 길었다. 이 작품은 구성도, 시점에 따른 서술도 독특하다. 주인공임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여자', '남자'로만 지칭하는 3인칭 시점의 냉철함이 보이다가도 돌연 '당신이 나에게 말을 건넨다'(46쪽)며 바로 코앞에서 말하는 듯 2인칭이나 1인칭으로 바뀌기도 한다. 편지 형식으로 화자가 바뀌기도 하고 존댓말이었다가 평어였다가 한다. 어느새 독자를 끌어당기기도 하고 독자가 바싹 다가가 쳐다보고 있으면 다시 영화 밖에서 화면을 보여주듯 어느새 관찰자의 시선에서 내용을 전달하기도 한다.



남자는 열다섯 살 때쯤 가족과 독일로 이민을 갔다. 그곳에서 정착하고 삶에 익숙할 때쯤 서서히 시력이 사라진다. 첫사랑의 아픔과 시력 장애의 고통 속에서 그는 귀국길에 오르고 희랍어 강사로 살게 된다. 여자는 출판사와 편집사에서 일하며 문학 강의도 했지만 어느 날 다시 찾아온 '그것'으로 모든 일을 그만두어야 했다.







"그것이 다시 왔으므로, 그녀는 그 일들을 모두 중단했다.

그것에는 어떤 원인도, 전조도 없었다."

12쪽




느닷없이 찾아온 실어증. 얼마 전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녀는 이혼하였고 하나뿐인 어린 딸의 양육권을 빼앗겼다. 상담을 받았지만 시간은 너무 오래 걸리고 고가의 치료비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크다. 정황상 그녀의 삶에 찾아온 충격과 트라우마가 '그것'이 찾아오게 된 강력한 동기가 되었음을 독자는 짐작할 뿐이다. '그것'이라는 말만으로도 공포가 느껴졌다. 스릴러는 아니지만 스릴러 같은 강렬함이 초반 독서의 망설임을 무뎌지게 한다. 용기를 준다.



챕터 구성도 독특하다. 1장에서 18장까지 거의 소제목 없이 숫자의 나열이다가 19장의 '어둠 속의 대화'를 기점으로 후반은 변화가 보인다. 성글게 구성된 마지막 두세 장의 독특한 표현도 시인의 면모가 느껴질 만큼 신선했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전개가 있으나 상당 부분이 의식의 흐름 및 기억도 펼쳐지기에 주인공들의 사연과 단상 사이에 혼란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서름서름하다'와 '뮈슬리'와 같은 낯선 외래어를 접해 어휘를 넓혀 좋았다. '서먹하다'라는 표현 외에 '서름서름하다'를 쓸 일이 있을까 싶지만 그만큼 단어 선택에 고민하는 작가의 모습을 떠올리기만 해도 묘한 기분이 든다. 단어 하나하나 소중하다는 생각과 함께.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뮈슬리'를 대했을 때는 솔직히 조금 투정을 부렸다. 영어도 아닌 음차 어휘의 의미를 알고 싶어 인공지능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후로도 인공지능과 친해진 계기를 많이 만들어준 작품이기도 하다:)



소설이 끝나가도록 먹먹한 그들의 현실에 변화는 없고 고통만이 머무를 것 같은 순간에도 그리 슬프지 않았다. 끝날 것 같지 않은 그들의 어긋남이,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그들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소통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여명 직전의 어둠이 가장 깜깜하지만 그 어둠을 뚫고 오는 첫소리는 시작의 소리다. 빛의 시작이며 끝이 시작이 되기도 한다. 죽음의 순간, 부활이 이루어지듯 희망을 감지하는 작품이다.





"두려웠어요.


두렵지 않았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어요.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 않았어요."

189쪽







모순적인 말과 양가감정의 문구 자체는 황당할 수 있지만 보르헤스의 칼이 이들에게는 견우와 직녀의 은하수가 되길 바라면 이 책의 여운과 느린 인사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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