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아름다운 나태주의 동시 수업>2
나도 모르게 습관적으로 핑계를 대는 분야가 있다.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라도 오면 소설과 시 중에 소설에 먼저 생각한다. 짧은 수수께끼 같은 시보다는 좀 말이 길어도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는 소설이나 산문이 낫다고 미리 철벽을 치곤 한다. 어쩌다 쉽게 다가가며 푹 빠지게 되는 시구를 만나면 '참 희한한 일이네'하며 드문 일, 예외적인 경우라 치부하며 시와 좀 더 친밀해질 기회를 저버린다. 겁을 먹는다.
이런 '어른 겁쟁이'를 위해 아주 낮고 동글동글한 옹벽으로 익숙한 시구를 만날 수 있다. <작고 아름다운 나태주의 동시 수업>에는 시였는지도 몰랐던 언어가 목걸이 사이사이에 끼워져 있는 작은 구슬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96쪽/ <작고 아름다운 나태주의 동시 수업> 나태주, 나민애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 않은가.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라는 첫 행을 읽기도 전에 시의 좌우 여백에 음표가 돌아다니는 듯한 느낌이다. 띄어쓰기로 구분된 단어가 둥둥 뜨면서 노래로 변하기 시작한다. '어라, 어디서 들어보았더라? 아니, 내가 부르기도 했는데.' 한 번 시작하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 같은 노래였다. 이 노래를 부를 때면 대개 내 앞에 누군가가 함께 했고 그 사람이 친구이든, 어린 조카이든 손뼉 치며 좋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나의 심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상평에 괜히 머쓱해진다. 반가워진다. 애매한 기억이 점점 선명해진다. 흐릿한 장면이 초점을 찾는다.
시는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나의 핑계가, 편견이 무너진다. 두껍게 올리고 또 올렸던 벽이 스스로 무너진다. 둘째 행부터는 대놓고 소리 내어 노래를 부른다. 어릴 적 친구와 마주 보며 처음에는 천천히, 그다음에는 좀 더 빠르게, 아주 빠르게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못할 정도로, 손이 아프고 얼굴에 열기가 흐를 정도로 빠른 속도로 반복했던 시절이 영화처럼 펼쳐진다.
손놀이를 하는 사람과 당시의 흥분뿐만 아니라 그 시절의 참으로 어렸던 주변의 상황, 장소, 어설펐던 나의 언행도 떠오른다. 굳이 '응답하라'시리즈를 틀지 않아도 머릿속에서는 추억의 영사기가 자동적으로 필름을 돌리고 있다.
'윤극영' 시인의 '반달'이다. 그러고 보니 계수나무와 토끼의 가사가, 아니 시어가(버릇이 참 무섭다) 이해간다. 글자로 박힌 시어를 보니 반달이라는 제목에 의아해진다. 보름달도 아닌 반달에 토끼가 제대로 있을 수나 있나. 하지만 반달은 조금만 각도를 조절하면 마치 작은 조각배의 이미지가 된다. 그제야 다른 시어가 눈에 들어온다.
'하얀 쪽배, 돛대, 삿대'
다시 시로 돌아가서 둘째 연을 읽어본다. 구전되는 동요라고만 생각했지 시인 줄도 몰랐으니 둘째 연의 존재가 더욱 신선하다. 옛 소녀들의 손놀이 친구를 해 주었던 동요, 아니 시의 제목과 시인은 누구인가. 인사도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간 것처럼 잠시 미안해진다.
간다고 한다. 서쪽 나라로. 지구의 자전으로 보이는 태양의 움직임처럼 달도 동쪽에서 서쪽으로 지는 형상이 담긴 시였다. 시인은 고민 끝에 천문학과 한국의 전설과 노랫말 같은 리듬을 담아 세상에 내놓았다. 손놀이에서는 불러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지만 시의 2연에서 돛대와 삿대도 없이 가버린 배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은하수를 건너서 구름 나라로
구름 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반짝 비치이는 건
샛별이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96쪽
노래를 불러보라. 시조의 음보를 맞추듯 1연과 쌍둥이처럼 꾸민 2연이 손놀이의 리듬에도 딱 들어맞는다. 누구나 이 시를 읽고 같은 느낌을 받지는 않겠지만 이 동시집을 읽고 오늘의 샛별이 되는 각자의 시를 발견할지도 모르겠다. 혹시 모를 일이다. 나처럼 이미 시와 놀았던 기억을 떠올릴지. 등대 같은 시를 만나 다시 길을 찾아 나아가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