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도서관에 간다. 칸막이가 있는 개인 열람실도 있지만 종합열람실을 이용한다. 어휘와 정보 검색을 하며 공부해야 하기에 노트북을 놓고 공부하려면 넓은 탁자가 있고 접근성도 더 낫기 때문이다. 시립도서관 대부분이 그렇겠지만 상대적으로 전 연령대가 모여 책을 읽거나 공부를 하는 시민이 선호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소리에 민감한 편이다. 소싯적에는 음악을 들으면서 공부하기도 하고 주변의 웅성거리는 소리에도 공부를 하곤 했다. 학교는 단체생활의 연속이니 집중이 되든 안 되는 습관적으로 한 것 같기도 하다.
어른이 된 후의 공부 스타일이 좀 달라졌다. 스스로 생각해도 소리에 민감해진 나 자신이 느껴진다. 원래 그런 것인지 나이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주변이 되도록 조용해야 집중할 수가 있다. 그래서 웅성거림이 가득하고 조명도 어두우며 음악이 흐르는 카페에서는 오랫동안 공부하지 못한다. 전보다 민감해진 나도 내가 불편할 때가 있다.
본능과 같은 반응이 자동적으로 나오기에 나도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불편하기는 하다. 어느 정도 백색 소음이나 주변의 어수선함 속에서도 집중을 잘하는 사람을 보면 부럽기까지 하니까. 도서관 열람실에 있어도 옆에서 사각사각하며 필기를 하거나 컴퓨터 자판 소리가 좀 크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 수치가 급등하곤 한다.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해도 '좀 자제를 해 주었으면, 무음 마우스나 키보드를 사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참는다.
어느 날 한 어른이 다른 책상에서 공부를 하고 계셨다.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남자분이었는데 그분도 나와 비슷한 민감도를 지니신 듯했다. 일부러 쳐다보지는 않았으나 내 왼편(그분의 오른편)에서 어떤 어른이 자판 소리를 '찰칵찰칵'거리며 글을 쓰자 잠시 후 다가가서 뭔가 속삭이셨다. 내용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았으나 대답하시는 분이 "아, 소리가 그렇게 큽니까?"라고 큰 소리로 답하는 걸로 봐서는 질문 내지는 부탁의 내용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었다. 잠시 후 어른의 부탁을 받은 분은 짐을 정리해서 다른 곳으로 갔다. 아마 본인도 본의 아니게 소음으로 피해를 주는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아까와는 소리의 데시벨 차이가 엄청 크게 느껴지는 소리가 났다. 나이 지긋한 여자분이
"뭐, 이 xx야? 신문 넘기는 소리가 뭐 어때서? 여기서 신문도 못 보냐? 그럼 책 넘기는 소리는 안 들리냐? 뭐라고? 시끄러워! 저리 가!"
내 오른쪽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에도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그 어른이 다른 곳에 있는 시민에게 조금 조용히 신문을 넘겨달라고 부탁한 것 같았다. 주변에는 대부분 어린 학생들, 젊은이들이 꽤 있었고 그 소란을 다 듣고 있었다. 겉으로는 누구도 이 소란에 끼어들지 않고 참고 있었다. '새가슴'인 나는 오늘 도서관에서의 공부는 포기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혼란스럽고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속으로 각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괜한 싸움에 휘말릴까 나서지는 않았지만 왜들 그리 싸워서 도서관 분위기를 흐릴까, 피해를 주면서까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자 어른이 너무 소리에 민감하다고, 오지랖이 참 넓다'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혹은 아무리 그래도 공공장소에서 욕설에 가까운 말을 큰 소리로 내뱉으며 제집인 듯 횡포를 부리는 여자분께 불만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놀란 가슴을 달래며 가뜩이나 읽히지 않는 책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자니 더 이상의 소란이 없어 나도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지만 한동안 많은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 모두 이해가 가면서도 둘 다 좀 지나친 면이 있었다고 말이다. 타산지석(他山之石)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자신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사자성어. 연령이 딱히 정해진 것은 아니나 어린이나 청소년 시절에 배우는 어휘 중에 하나다. 이날의 극단적인 에피소드를 겪으며 타산지석은 어른일수록 더욱 배우고 수양해야 할 덕목 같다. 같은 어른으로서 괜히 부끄러운 기분도 들었다. 소음 문제로 주변에 피해를 주며 소란을 일으키는 싸움을 들으며 어린 학생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민감도는 상대적이라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가름하기 쉽지 않지만 좀 더 참는 노력은 할 수 있다. 남의 눈치를 너무 보는 것도 안 좋지만 그렇다고 자유에 대한 맹종으로 주변에 피해를 주며 나 몰라라 하거나 마구 공격하는 행위 또한 너무 이기적이지 않은가.
장소와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도시의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부딪힐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내가 피해를 주는지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고 안다고 해도 모든 규범을 지키기에 버거울 수도 있다. 확실한 건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라는 것.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이 진리에 각자 다른 인간이 맞춰나갈 수 있을까. 당연한 혜택도 감사하며 타인에 대한 배려가 곧 내게도 언젠가 돌아온다고 여기면 어떨까. 물론 쉽지는 않다. 한번 통했다고 해서 내 욕구를 공격적으로 발산하면 순간의 시원함만 있을 뿐이다. 그다음에 오는 공허함, 외로움, 고집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시민의 멋진 삶, 풍요로운 삶, 어른다운 어른의 삶은 바로 끊임없이 배우고 타인에게 강요하고 싶은 좋은 덕을 나에게도 적용해 보는 것은 어떨지.
꼰대에도 등급이 있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자연히 꼰대의 이미지가 생기기도 한다. 본인이 아무리 잘해주고 쿨하게 굴어도 자녀에게는 부모가 꼰대처럼 보이는 것처럼. 하지만 조금만 더 상대의 입장을 생각하고 나를 돌아보는 연습만 한다면 멋진 꼰대는 아니어도 밉살스러운 고집쟁이는 안 될 것이다. 가끔 어울림은 어렵다. 배려는 피곤하다. 하지만 조화로운 배치와 작은 수고를 통해 무엇보다 아름다워질 수도 있다. 한쪽만 100, 다른 한쪽이 0인 에너지 발산은 너무 불공평하다. 아무리 갑을 관계라 해도. 오늘부터라도 내가 50, 아니 10이라도 조금씩 타인을 위해 에너지를 써보는 연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