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든 소녀의 마음으로
어느 주말 나의 기말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마침 글로리아(둘째)도 아르바이트가 있어 유독 부산한 아침이었다. 온종일 일할 아이를 위해 안드레아(남편)는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었고 나는 나대로 준비 중이었다. 나날이 더워지는 요즘 아침부터 숨 막히는 기분.
머리를 감았다. 어색한 각도로 얼추 머리는 감을 수 있었다. 시험 때문에 정형외과 진료도 일주일 미루었다. 바쁜 남편은 여전히 거실에서 아이를 챙기고 있었다. 나는 욕실에서 나와 방구석에서 헤어 드라이기를 켰다. 갑자기 하던 일을 멈추고 방에 들어온 안드레아.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해도 내가 혼자 머리를 말릴 수 있지만 팔이 부러진 이후 그는 늘 그만의 루틴을 반복한다. 헤어 드라이기 소리가 나면 그가 5초 내로 방으로 들어온다. 나는 고마움 반, 미안함 반을 느끼며 그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가 다가와 내게서 헤어드라이기를 가져간다. 나는 굳이 거절하지 않는다.
그가 내 머리를 말려 준다.
그가 내 아침을 챙겨 준다.
내가 공부를 시작하면 말없이 자리를 피해 준다.
내 곁에 있으면서 나만의 공간을 마련해 준다.
시험장으로 데려다주고는 손을 흔들어 준다.
우리는 잠시 시선을 맞춘다.
나는 시험장으로 향하고 그는 기다린다.
나는 시험을 마치고 나온다.
그는 나를 맞이한다.
집으로 오는 길 나는 시험을 망친 것 같다며 투덜댄다.
그가 위로한다.
어느새 나는 진정되어 있다.
그는 그렇게 그날도 궤도를 이탈해 내 주위를 맴돈다.
자발적 행성이 된다.
자발적 위성이 된다.
자발적 태양이 된다.
자발적 달이 된다.
김창옥 선생님의 강연 중 농담이 떠오른다. 소녀 같은 할머니의 남편은 다정하다는 말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종종 나이에 비해 왜 여전히 철없는 어른으로 사는지, 어떻게 소녀 같은 마음으로 살 수 있는지를.
그는 나의 어린 왕자가 되고 나는 그 덕분에 까칠한 장미가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나이 들면서도 안에서 소년과 소녀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