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아이러니

by 애니마리아


'끼룩끼룩, 찌르르'


언제부터인가 매미소리가 아닌 귀뚜라미 소리가 들려왔다. 때로는 은은한 클래식 음악처럼, 때로는 귀뚜라미 올림픽이라도 열린 듯 요란스럽게.



낮은 여전히 덥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그늘과 바람이 나부끼는 것만으로도 가을을 느낀다. 가을은 사계절 중 가장 짧지만 봄과는 또 다른 향기를 발산하며 아쉬움과 상쾌한 풀 내음으로 행복을 느끼게 하는 계절이다.







이 가을에


아직도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

나태주/151쪽『너를 아끼며 살아라』




너를 사랑해서 슬프다니, 이 얼마나 모순된 말인가.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문구만큼 인생을 닮은 말이 있는가 싶기도 하다. 차라리 사랑하지 않는다면, 관심조차 없다면 아프지 않을 일이 얼마나 많은가. 가까운 사이지만 때로는 원망스럽고 버거울 때가 있지 않은가. 사랑하지만 차마 사랑한다는 말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때도 있다. 마치 고슴도치가 되어버린 듯, 사랑하지만 너무 가까이하면 서로를 찌를 것 같은 두려움에 시달릴 때도 있다. 차라리 멀리서 바라보며 서로의 안녕을 바랄 때도 있다.



가족, 친구, 연인 사이는 어떤가. 어떤 사정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서로 헤어져 있어야 하는 환경 아래에 자발적으로, 타인에 의해 놓일 때는 어떤가. 얼마 전 미국에서 느닷없이 구금되어 범죄자 취급을 받아야 했던 한국의 근로자들, 가족들의 불안. 그 가운데 일부 한국인은 합법적인 비자 상태임에도 아니 사람들과 섞여 한 무리 취급받으며 인권침해를 겪어야 했다. 직계 가족이 아니더라도, 한 동포로서, 인간으로서 그들을 바라보며 슬퍼한 사람도 있었을 테다.



가을에 가을이 있어서 추운 겨울의 혹독함을 맞이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다. 가을이어서 따뜻한 기온이, 남아있는 온기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우칠 수 있다. 가을의 낙엽이 있어서 푸르고 싱싱한 젊음뿐만 아니라 온전히 생명을 다하고 물러나는 생명이 숭고한 풀 향기에 감사할 수 있다. 가을이 있어서 밖에서 책을 읽는 일이 그 어떤 여행보다 멋질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을은 개인적으로도 기념할 일이 많은 계절이다. 내 영혼의 짝과 결혼한 날이 있고, 첫아이가 태어난 날이 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정말 행복한 기억은 그 당일이 아니라 큰일을 준비하며 기다리던 나날이었다. 결혼을 준비하며 불안하고 설레지만 긴장감을 잠시 내려놓고 안드레아와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먹던 나날. 예정일이 다가올수록 아이 볼 생각에 궁금하면서도 손도 발도 퉁퉁 부어 눈사람처럼 살던 가을의 기억. 가을은 사랑하지만 슬플 수도 있고 슬프지만 사랑이 넘치는 계절이다.



대외적으로는 한가위가 있고 독도의 날도 있다. 새해를 맞이해 설날 가족이 모여 한 해의 복을 나누던 늦겨울의 움직임과는 다르다. 명절을 준비하며 한 해를 점검하며 지친 자신과 서로를 위해 감사하는 계절이 가을이다. 한때 코로나 시절, 밖에서조차 마스크를 제대로 벗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다. 짧은 가을의 향기를 느껴볼 새도 없이 겨울을 맞이해야 했던 시기에 우리는 마음껏 마시는 가을 공기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누리면서도 누리는 행복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낭비가 있을까.



올해 가을도 결코 길지 않을 것이다. 올해만의 가을 하늘은 다시 보기 힘들지도 모른다. 소중한 이 가을, 마음껏 사랑하길 바란다. 사람이든, 책이든, 내가 좋아하는 그 무엇이든. 그 아픔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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